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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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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도언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2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금산

직업:소설가 시인

최근작
2024년 2월 <홍대에서의 바람직한 태도>

검은 혁명가 맬컴 X

맬컴 X는 바로 문화적 무의식 속에 잠재된 관념에 저항한 사람이다. 그 저항은 그래서 더욱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금력에 저항하고 물리력에 저항하고 지위에 저항하는 것은, 삶의 일차적인 조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일이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문화적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고정 관념에 맞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 미국에 들어와서 여전히 백인들에 비해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는 흑인들의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권태주의자

가는 말과 오는 말 사이에서 멈추는 말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찾았으나 늘 실패했다. 나에게 오다가 멈춘 너의 말 너에게 가다가 멈춘 나의 말 멈칫멈칫 멈춘 말들의 미래를 상상한다. 닿지 않아서 숭고한 말들의 미래 실패할 테지만 그 말을 찾아 또 떠나야 한다. 실패는 나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 밀과 보리가 자란다.

꺼져라, 비둘기

혼돈에 관대한 세상에서 왜 단호한 정립이 필요한 것일까. 악에 관대해지고 선에 야박해진 현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둘의 정치한 위상의 변화에 대한 조롱과 풍자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 위해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더 정형적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분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관은 이를 통해 결정된다. 그것은 물처럼 출렁이며 그 위치를 바꾸지만 커다른 틀 밖으로 여간해선 넘치지 않는다. 급변하는 세계/체계와 이에 따라 변해야 하는 가치 규범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가, 이 소설 속에는 있다. 평화의 상징=비둘기였던 시대를 지나 지금의 비둘기는 바퀴벌레등과 함꼐 혐오 생물이 되버리지 않았는가, 이때 작가는 꺼져라, 비둘기라고 명명하는 사회의 위선과 함부로 변하는 도덕적 가치 기준에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매우 예민하며 정확하다. 그리하여 작가는 고정불변하는 선악의 가치값을 이야기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은 소년과 시인의 시선이다. 이 둘의 눈에는 거짓과 가식이 배제된다. 그들은 영혼의 무결을 믿으며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런데, 이 믿음과 확신이 반갑다. 우리는 이러한 이들에 대해 뻔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멀리해왔다.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김도언의 소설은 그러므로, 소설의 귀환이라고 명해도 될 것이다. 꺼져라, 비둘기는 우리도 모르게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으려는 소설이다. 그 가치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일 수도 있고, 우리의 삶 속에 자리고 있으나 탈색되어가는 이야기성의 재발견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알고 있고, 함께하고 있다고 믿으나 실은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김도언은 이야기꾼의 자격으로 매우 중요한 과제를 행해내고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삶을 삶으로 살아가게 하기. 그리하여 모두 즐겁게 하기.

남의 속도 모르면서

섹스에 대해서 소설을 쓰라는 요구가 왔다. 온몸에서 작가 ‘삘’이 충만한 작가라면, 마다할 리가 없다. 재밌는 것은 청탁을 받은 작가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남자들의 공통점이 무얼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것은 발기한다는 것이다. 발기는 놀라운 집중과 응축의 결과물이다. 자, 여덟 명의 남자들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최대한 발기시킨 채 섹스에 대한 소설을 썼다. 야한 것도 있고 혹한 것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부디 이 소설들이, 우리 사회에서 소설에 대한 진지한 명상과 사유의 계기를 만드는 메신저가 되길 바란다. 이중성의 그물이 찢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작가를 대표하여 김도언 씀

랑의 사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주로 일주일 동안의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주말 저녁, 내 작은 방에서 씌어졌다. 정기적인 노동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은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름대로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노동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나 자신을 끔찍하게 부정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백치가 되었을 것이다. 노동은 그러므로 내게 썩 유효한 항우울제 처방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 소설 쓰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의 수동적 욕망과 휴식의 능동적 욕망이 서로 마찰을 일으킬 때 내 안에서 피어나는 몽상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숙취로 쓰린 배를 움켜쥐고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갈 때, 다시 말해 하루치의 양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감내해야만 하는 모독을 생각하며 지레 겁을 먹고 인상을 찌푸릴 때, 불현듯 귓가에 들려오는 세이렌의 목소리 같은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의 음계를 머릿속에 잘 저장해뒀다가 모니터 위에 풀어내는 것뿐이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쓰는 동안 나는 줄곧 ‘사태’라는 개념에 골몰해 있었다. 나는 사태를 사건이나 상황 따위와는 다른, 좀더 본질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개념을 가진 어떤 ‘문제적’ 정황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본새를 이끌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리한 바에 의하면, 사태는 시간의 부식성에 저항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의 진화하는 풍경이다. 그러므로 사태는 종료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개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문제는 해소되거나 말소되는 문제가 아니라 계속 증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하룻밤 잠을 자본 이라면 알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눈앞의 세계가 바뀌어 있다는 것. 산처럼 높은 사구가 바람에 의해 하룻밤 사이 뭉개져 있는 비현실 같은 현실 세계. 사구가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분명하게 움직이는 이와 같은 사태는 비현실 같은 현실 세계의 지위를 갖고 인간의 의식에 침투하는 것이다. 내 소설 쓰기는 그것의 엄밀한 보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은 다름 아닌 ‘사태의 꽈리’ 같은 것일 테니까.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그것은 나의 오랜 희망에 관한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나의 희망은, 당신이 모르는 최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내가 아닌, 나일 수 없는 모든 타자를 의미한다. 당신이 아는, 혹은 당신에게 들켜버린 나에게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당신이 아는 나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이 재미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당신이 나를 모를 때, 나는 그런 나에게서만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당신이 나를 알지 못할 때 오히려 나는 당신에게 진실해질 수 있다. 다시, 나에게 소설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당신이 알아볼 수 없도록 끊임없이 나를 색칠하고 지우는 작업이라고 대답하겠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소설책을 내게 되어 참 기쁘다. 요즘도 촌스럽게 이런 소회를 밝히는 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문지’는 내 문학적 열망의 압도적인 아이콘이었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분들께 빚을 지면서 살고 있지만 우찬제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드린다. 흠이 많은 소설들을 너그럽게 봐주시고 책으로 묶일 수 있게 도와주셨다.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어지럽고 난삽한 소설에 해설을 붙여주신 오생근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더욱 거짓 없는 치열한 소설 쓰기로 두 분 선생님께 보답하고 싶다. 문우이자 사랑하는 나의 동반 K에게도 각별한 인사를 전하고 싶고,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문지 편집부에게도 우정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나의 어머님, 그리고 대전의 부모님께도 고마움의 절을 올린다. 2009년 7월 김도언

미치지 않고서야

이 얇은 책은 나의 단독 저작물로서는 네 번째 소설책이다. 책을 펴낼 때마다 늘 조바심이 이는 걸 어쩔 수 없다. 이 조바심은, 내가 소설을 쓰는 동안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는가, 내가 선택한 언어는 적합한가, 내 소설이 강한 것에 반대하고 있는가 따위의 자괴적인 자문과 그 자문에 대한 석연치 않은 대답이 반복되는 동안 내 안에 자리를 만든 것이다. 이번 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혹여 내 소설을 꾸준히 따라 읽은 독자가 있다면 그는 이 소설이, 그간 내가 써온 소설에서 얼마간 이격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 중에서 나 자신의 육성이 가장 현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소설이다. 물론 그것은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 이르러 나는, 내적 경험이나 일상적 체험을 거의 끌어들이지 않은 채 오로지 상상과 가공, 편집과 연출이라는 기능적 도구만을 이용해 작품을 밀고 나간 것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의 내 심사는, 의뢰인의 주문을 받아 주어진 블록만으로 성을 쌓아야 하는 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이 일곱 남자의 이름은 내가 근년에 가장 가깝게 어울린 실제 친구들의 이름이다. 그중엔 소설을 쓰는 친구도 있고, 시를 쓰는 친구도 있고, 직장에 다니는 친구도 있다.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쓰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 소설을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게 안겨준 어떤 이미지를 때로는 고스란히, 어떤 경우엔 반역적으로 소설 속에 차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은 그들에게, 아니 그들의 청춘과 그 청춘의 방황에게 바치는 소설이다.

소설가의 변명

1. 나는 어릴 때부터 경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나를 다른 사람과 견주는 것도 싫어했고 나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기고 앞서 가라면서 줄을 세우는 제도권 교육이 정말 싫었고 당연히 줄을 서지도 않았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는 나의 이 같은 풍속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내가 참여하는 일에서 1등, 베스트원이 되는 걸 한 번도 원했던 적이 없다. 나는 동료 작가나 시인의 작품보다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다만 내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집중했다. 내 목소리와 색깔을 어떻게 낼 것인가, 이것만이 내 관심사였다. 그러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의 서열을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이익을 분배하고, 그 이익 앞에서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예술계도 문학판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좌도 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로서 나는, 이 제도화된 생태계의 폭력적인 구조, 미친 시스템을 묘사하는 데 내 문학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욕망, 위선, 위계, 지배, 해방.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탐구 대상인 것이다. 평소의 내가 현실정치나 현안에 대해 비교적 거리를 두는 것은, 그것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내가 아니어도 나보다 그런 일을 잘할 사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2. 이 책에 모인 글들은 한국일보에 2012년 겨울부터 2014년 가을까지 2년 가까이 연재했던 것들이다. 소설가로서 내 눈에 들어오는 세계의 다양한 형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심상을 묘사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내 사유와 감각의 첨단을 찾아 표현하려는 열정의 소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형식과 내용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에피소드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흐릿한 관념이나 몽상적 에피그램의 형태를 띨 때도 있으며, 때로는 견고한 주장이나 선언의 목소리를 가지기도 한다. 나는 이런 것들이 포괄적인 의미에서 ‘변명apologia’이라고 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는 실존적 변명 말이다. 그런데 이 변명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추궁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인 당신의 추궁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더 적극적으로 변명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세계가 당신의 추궁과 나의 변명으로 가득 차기를. 그 문답의 행간에서 이 세계가 비로소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3. 간밤부터 비가 내린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는 다행히 빗소리가 잘 들린다. 비가 제법 오면 물 흐르는 소리, 그러니까 빗물이 돌계단을 흘러내리는 소리까지 들린다. 왜 빗소리 얘길 하냐면, 요즘 나에게 큰 위안이 바로 빗소리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씻김을 받는 기분이랄까. 깊이 스미기 위해 빗물이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나는 좀 더 나의 내부로, 내 고유한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세상에 고개를 함부로 내밀었다가, 보지 않아도 좋을 것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세계의 창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부터 말이다. 4.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 싶다. 어수선한 원고를 귀한 책에 담아주신 gasse 김남지 대표님과 미지의 독자께, 그리고 내 삶의 허기와 욕망을 송두리째 돌아볼 수 있는 절대적인 적막을 허락해준 K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15년 봄, 새절에서 김도언

악취미들

에곤 실레를 포함해 그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 역시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든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오해를 받을 때조차 나는 훌륭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좀 불손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따위가 아니라, 내가 정말로 글로써 만들어내고 싶은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낸 이후, 내게 찾아올 그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결핍과 결락의 공포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이 지독한 존재의 역설을 문제 삼을 뿐이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

나는 부유하는 먼지로 가득한 세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종국에는 바스러지고 마는 지루한 존재의 비밀스러운 표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멋있는 행동과 세련된 말이 존재하지 않는 삶의 사소함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삶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뿐이지 언제나 압도적인 사실로 존재한다. 비주류적 세계의 질서 같은 게 있다면,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 그걸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 소설이 의도한 게 있다면 이 정도다. ... 나에게 이 삶은 어수룩해서 아름답다. 나는 누추하기 때문에 이 삶을 사랑한다. 마른 우물 속 같은,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는 세상의 틈을 들여다본 기분이다.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나는 이제까지 소설을 깔보지도 않고 우러러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소설이, 누군가를 깔보게 하거나 누군가를 우러러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만약 소설이 누군가를 높이고 누군가를 낮출 수 있는 영악하고 치사한 것이었다면 나는 소설을 애초에 가까이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소설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이처럼 소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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