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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경림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36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 (양자리)

직업:시인 대학교수

기타: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최근작
2024년 3월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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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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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나는 네권의 선집이 더 있다....... 작품 선정에 따라서 의미와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선집을 내면서 스스로 받는 위안이다.

검은 돌 숨비소리

“수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우리가 시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무자년 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4·3의 참혹함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이름도 모르는 목숨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시 소리 내어 불러줌으로써 우리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상처를 다시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땅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그 비극이 우리의 정신을 또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낙타

... 시집 <낙타의>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농무

시집 <농무>를 내놓고 나서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긴급조치가 내렸다. 많은 친구들이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거나 또는 구속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서 <농무>가 분에 넘치는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고생하는 친구들을 생각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이것이 이를테면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진 소박한 소신이었다. 그 결과 여기 증보판을 정리하면서, 한 용기 없고 소심한 자화상을 대하게 된다. 겁많고 연약한 가락들은 내가 참으로 증오하는 터이지만, 이것들이 결코 내 참 목소리의 한가닥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언제고 이것들을 내 몸에서 완전히 털어버릴 때, 그리하여 내 목소리가 좀더 우렁차고 도도해질 때 나는 여러분 앞에 당당한 얼굴로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 신경림(시인)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평소 지인들로부터 수차례 자서전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은 일이 있지만 번번이 거절한 것은, 내 삶이 남의 흥미를 끌 정도로 화려하지도 못했고 또 기록으로 남길 만큼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였다. 말하자면 너무나 재미없는 평범한 글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의 두 글을 쓴 것은 하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도 앞서 산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공부하며 자랐는가를 알았으면 해서였고, 또 하나는 오십여 년 전 문단의 풍속도를 아는 것이 우리 문학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 그러나 써 놓고 생각하니 이러한 글들도 내가 시를 쓰는 일을 적잖이 도왔으며,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다소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면구스러운 점 없지 않으면서도 책으로 낼 용기를 냈다. 독자들이 웃고 읽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뭉클

나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데는 선행 시의 힘이 물론 컸지만 산문의 영향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령 김기림의 「길」이나 정지용의 산문들을 읽었을 때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산문을 써보는 것이 내 문학수업의 주요한 내용이 되었다. 대체로 오래전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글들은 지금 읽어도 감동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책을 엮는 기쁨을 맛보았다. 글을 선選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이 아니고 ‘뭉클’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뭉클’은 ‘문학적’보다도 한 자리 위의 개념일 터이다.

바람의 풍경

나 자신을 더 깊게 들여다 보자,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이런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이 자기 존재의 전방위적 확인이라고 할 때 시 외에 이 산문들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한 방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가로 쓴 것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독자에게 즐거운 읽을 거리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가져본다.

바람의 풍경

나 자신을 더 깊게 들여다 보자,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이런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이 자기 존재의 전방위적 확인이라고 할 때 시 외에 이 산문들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한 방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가로 쓴 것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독자에게 즐거운 읽을 거리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가져본다.

나는 요즈음 시도 한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르고 지나간다. 그래도 시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그냥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한때는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

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시세계는 한두마디로는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폭이 넓다.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 또한 유연하고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며, 잘난 체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으면서 더없이 편하고 재미있다. 말이 다른 나라의 시가 이토록 재미있고 친근하게 읽히는 경우는 여간해 없을 것이다. 시인의 순수한 삶과 거짓 없는 글쓰기를 엿보게 하는 산문들도 감동적이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애초에 내가 '시인을 찾아서'를 쓴 목적은 말하자면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시를 붙잡아 독자들에게 다시금 보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 시인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들어, 우리로 하여금 삶과 사물을 새롭게 보고 해석하게 하는가를 알리고 싶었던 터다.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는 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줄곧 기쁨에 들떠 있었다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데는 부분적으로 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무책임한 말장난은 더 말할 것도 없겠으나, 가령 독자와의 소통을 아예 포기하고 아무런 열쇠도 주지 않은 채 내면이라는 골방으로 들어가 처박힌다면 독자가 어떻게 그 시를 좇아가며 사랑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시를 곰곰이 읽고 시를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데는 관심도 없는,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시 교육(문학 교육)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실제로 시험 문제 위주로 시를 공부한 학생이 시라면 넌더리를 내면서 멀어지는 예를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이 글은 이런 점을 다소나마 극복해 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과연 이 의도가 얼마나 살았는지 자신할 수가 없지만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지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참된 것을 찾는 뜻이 없어지지 않는 한 시는 존재를 이어갈 것이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기도 계속할 것이다. - 개정판 여는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데는 부분적으로 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무책임한 말장난은 더 말할 것도 없겠으나, 가령 독자와의 소통을 아예 포기하고 아무런 열쇠도 주지 않은 채 내면이라는 골방으로 들어가 처박힌다면 독자가 어떻게 그 시를 좇아가며 사랑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시를 곰곰이 읽고 시를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데는 관심도 없는,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시 교육(문학 교육)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실제로 시험 문제 위주로 시를 공부한 학생이 시라면 넌더리를 내면서 멀어지는 예를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이 글은 이런 점을 다소나마 극복해 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과연 이 의도가 얼마나 살았는지 자신할 수가 없지만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지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참된 것을 찾는 뜻이 없어지지 않는 한 시는 존재를 이어갈 것이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기도 계속할 것이다. - 개정판 여는글

처음처럼

시로는 돈을 벌지도 못하고 쌀을 생산하지도 못하며 자동차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벌고 쌀을 생산하고 자동차를 만드는 그 주체인 사람을 즐겁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답게 살게 만든다. 물론 시의 영향이 옛날 같지는 않다. 영상물이며 인터넷 등 보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매체가 발달하면서 영역이 크게 좁아진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게다가 이제는 아무도 진지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골치 아픈 것은 덮어놓고 피하고 본다. 쉽고 가볍게, 이것이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시가 문명이 발달한,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더 좁은 영역으로 쫓겨나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시는 이제 영 버림을 받고 말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의 독자가 더 줄어들겠지만 시란 좋은 것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시는 결코 완전히 패퇴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소수에 의해 더 집중적으로 애호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를 즐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이 맛보지 못하는 삶의 즐거움을 하나 더 가지고 세상을 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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