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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외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성별:남성

국적:유럽 > 남유럽 > 이탈리아

출생:1932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염소자리)

사망:2016년

직업: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

기타:토리노대학교 중세철학과 문학 전공.

최근작
2022년 10월 <에코의 위대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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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유혹

이 책에 모아놓은 각각의 논문을 쓸 당시 내가 가졌던 생각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아도 아주 소중하다. 이를 단서로 나는 다른 많은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논문들은 이젠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처럼 책으로 묶어서 다시 내놓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대중의 영웅

1950년대 말부터 내가 매스커뮤니케이션 현상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동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지배 하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만으로도 그러한 대상을 검토해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나는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네오아방가르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는데, 특히 '난해한' 예술과 '평이한' 예술 간의 변증법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청년 조이스의 다음과 같은 소견, 즉 "시가 아니라 뮤직홀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말이 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미네르바 성냥갑 1

칼럼의 제목은 미네르바라는 상표의, 성냥이 담긴 두꺼운 종이로 된 조그마한 갑에서 따온 것이다. 그 성냥의 <표지> 뒷면에다 종종 주소라든지 지출 목록을 기록해 두거나, 또는 내가 종종 그러하듯이 기차 안이나 바에서, 식당에서, 신문을 읽거나 가게의 진열장을 바라보면서, 책장의 서가들을 뒤지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속기로 메모해 두곤 한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이 칼럼에서 내가 추구한 또 다른 기준이 하나 있다. 가령 엄마를 죽이는 것은 부당한 행동이라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 굳이 내가 글을 써서 그건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착한 감정을 선동하는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 성냥갑 2

칼럼의 제목은 미네르바라는 상표의, 성냥이 담긴 두꺼운 종이로 된 조그마한 갑에서 따온 것이다. 그 성냥의 <표지> 뒷면에다 종종 주소라든지 지출 목록을 기록해 두거나, 또는 내가 종종 그러하듯이 기차 안이나 바에서, 식당에서, 신문을 읽거나 가게의 진열장을 바라보면서, 책장의 서가들을 뒤지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속기로 메모해 두곤 한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이 칼럼에서 내가 추구한 또 다른 기준이 하나 있다. 가령 엄마를 죽이는 것은 부당한 행동이라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 굳이 내가 글을 써서 그건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착한 감정을 선동하는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마치 나의 패러디에서 영감을 받은 듯 최근 "해체주의적인 책읽기"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패러디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먼저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 걱정해서는 안 된다. 진지한 목적을 갖고 끝까지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진지함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다른 이들이 훗날 만들어낼 내용을 예고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

1950년대 말부터 내가 매스커뮤니케이션 현상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동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지배 하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만으로도 그러한 대상을 검토해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나는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네오아방가르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는데, 특히 '난해한' 예술과 '평이한' 예술 간의 변증법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청년 조이스의 다음과 같은 소견, 즉 "시가 아니라 뮤직홀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말이 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이 글들의 일부는 무엇보다도 이론가로서의 나의 활동이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자서전적이거나 자기비판적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두 가지 역할의 혼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란 무엇인가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필요하다.

칸트와 오리너구리

해석의 한계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이 한계가 문화나 텍스트에만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더욱 심층적인 층위에 원인이 있는지를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의 제1장에서 존재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것은 전지전능의 과시가 아니라 직업윤리의 표출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언어의 자유에 한계를 부과한다고 느끼는 한에서만, 나는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이 책을 위해 선별된 에세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일간지나 주간지를 위해 쓴 논문들이다(몇 개는 월간평론지를 위해 쓴 글인데, 물론 철저하게 아카데믹한 잡지만은 아니다). 일부는 일정한 기간에 걸쳐 동일한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다른 것들은 상호 모순적이다(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일정한 시기의 경과를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지식인은 한때 개인의 일기나 사신(私信)을 이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문을 이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저러한 사건에 열을 받거나 이러저러한 느낌이 밀려오면 누군가가 읽고 곧 잊어버리겠지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써두어야 한다. 나는 "아카데믹한" 저서에서 쓴 내용과 신문에 쓴 내용이 전혀 괴리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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