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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은희경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9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

직업:소설가

기타:숙명여대 국문과,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최근작
2023년 11월 <타인에게 말 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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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빛의 과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나쁜 버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소설을 따라가는 일기”라는 제목의 파일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럴듯함,을 경계하자. 가장 비겁하고 천박한 것. ―자꾸 외연을 넓힌다. 힘이 덜 빠진 것이다. 힘을 잘 빼면 안 무거워지는 한편 안 가벼워진다. ―왜 집중이 안 돼? 아무 쓸모 없는 화려한 문장만 공들여 만들고 있다니. 이게 공허한 무기 자랑이 아니고 뭔가.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썼다. 이 책은 나의 여덟번째 장편이다. 10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여섯번째였을 것이다. 8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제목은 “번개 들판”이었겠고 내 주인공은 처음 계획대로 오십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어머니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연희문학창작촌으로 나를 찾아와 어린 시절 내가 얼마나 의젓한 아이였는지 몇 번이고 얘기해주었다. 그해 가을 잠을 설친 어느 새벽 토지문화관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다음 해 21세기문학관에서 가까스로 이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감사드린다. 연재를 끝낸 뒤 원고를 고치는 과정에서도 실패는 계속되었다. 왼쪽 눈의 망막에 구멍이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책의 저자가 되는 일에 의욕을 잃은 것이 더 큰 실패였다. 이렇게 마칠 수 있었다는 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글 쓸 공간을 마련해준 분들과 오래 기다려준 출판사, 나의 독점 피처링 편집자 K, 그리고 문지의 이민희 편집자와 이경진 디자이너께 감사드린다. 정세랑 작가와 신형철 평론가에게도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나, 무조건 짧게, 빨리 쓰자. 그것이 내게는 가장 새로운 소설이다. 둘, 이해받으려고 하거나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글에는 결코 ‘발견’이 없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신랄한 외부 시선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나는 단지 조금 빠를 뿐이에요’라는 설정은 '단지 조금 느릴 뿐이에요’보다 약간은 신선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속셈은 뭐지? 결국 변명 아냐? 라고 반박하는 시선이 반대 방향의 장력으로 잡아당겨야만 이야기라는 평면이 펼쳐지고, 그래야만 누군가가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셋, 그 시절 우리 참 치졸하고 나이브했지. 그래도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내 삶에 어떤 새로움이 있겠어. 넷, 도대체, 이 망할 장편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하지만 아시는지? 끝난 소설은 무조건 해피엔드이다. 2019년 늦여름 은희경

그것은 꿈이었을까

분명 처음 가는 길인데 언젠가 와봤던 곳 같고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딘지 낯이 익고, 그래서 기억해내려다가 끝내는 포기했던 일이 있다. 꿈속에서 본 걸까. 꿈은 인생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살고 있고 꿈속에서도 살아간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구 년 전 이 책을 내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시간이 지나가면 내 생각은 또 변할 것이다. 그때에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여전히 옳다고 말하게 될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지 어떨지도 자신이 없다. 지금의 나는 십 년쯤 더 늙었지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늙음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아직도 이따금 이건 타인이 꾸는 나쁜 꿈이야, 라고 중얼거릴 때가 있지만 그래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발밑까지 타들어갈지언정 길고 긴 꿈을 꾸고 싶다. 일상의 심박동이자 지극히 사적인 양심행위로서. 세기말에 낸 책을 세기 초에 또 내게 되다니, 아닌게 아니라 좀 꿈같다.

마이너리그

나는 내가 남자에 대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고 여자를 미화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탐문이 아니다. 그냥, 사람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이란 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사회 속에서 모양이 만들어지고 구부러지고 닳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은 한때 나로 하여금 남성성에 대한 신랄함을 갖게 했다. 이제 나를 세상의 남성과 화해하게 만든 것은 삶의 마이너리티 안에서의 동료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불완전한 도중(道中)에 있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에 반해 어떤 변화는 너무나 느리다. 개정판을 내기 위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우리는 그때에 비해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사랑의 미혹과 욕망,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시스템. 두 종류의 틀 속에서 여전히 마지막 춤을 혼자서 추고 있는 건 아닐까.”

비밀과 거짓말

이 소설로서 나는 인생의 존엄이 존엄한 태도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또 한번 겁없이 농담을 던진 셈이 되었다. 때로 나는 내 인생이 내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의 긴 문학토론 같은 고단한 여정으로 예정돼 있으리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새벽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창 밖에는 다음 차례의 고통이 이미 도착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선 놀아야겠다. 노는 것처럼 신나는 것은 없다.

빛의 과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나쁜 버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소설을 따라가는 일기”라는 제목의 파일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럴듯함,을 경계하자. 가장 비겁하고 천박한 것. ―자꾸 외연을 넓힌다. 힘이 덜 빠진 것이다. 힘을 잘 빼면 안 무거워지는 한편 안 가벼워진다. ―왜 집중이 안 돼? 아무 쓸모 없는 화려한 문장만 공들여 만들고 있다니. 이게 공허한 무기 자랑이 아니고 뭔가.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썼다. 이 책은 나의 여덟번째 장편이다. 10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여섯번째였을 것이다. 8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제목은 “번개 들판”이었겠고 내 주인공은 처음 계획대로 오십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어머니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연희문학창작촌으로 나를 찾아와 어린 시절 내가 얼마나 의젓한 아이였는지 몇 번이고 얘기해주었다. 그해 가을 잠을 설친 어느 새벽 토지문화관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다음 해 21세기문학관에서 가까스로 이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감사드린다. 연재를 끝낸 뒤 원고를 고치는 과정에서도 실패는 계속되었다. 왼쪽 눈의 망막에 구멍이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책의 저자가 되는 일에 의욕을 잃은 것이 더 큰 실패였다. 이렇게 마칠 수 있었다는 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글 쓸 공간을 마련해준 분들과 오래 기다려준 출판사, 나의 독점 피처링 편집자 K, 그리고 문지의 이민희 편집자와 이경진 디자이너께 감사드린다. 정세랑 작가와 신형철 평론가에게도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나, 무조건 짧게, 빨리 쓰자. 그것이 내게는 가장 새로운 소설이다. 둘, 이해받으려고 하거나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글에는 결코 ‘발견’이 없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신랄한 외부 시선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나는 단지 조금 빠를 뿐이에요’라는 설정은 '단지 조금 느릴 뿐이에요’보다 약간은 신선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속셈은 뭐지? 결국 변명 아냐? 라고 반박하는 시선이 반대 방향의 장력으로 잡아당겨야만 이야기라는 평면이 펼쳐지고, 그래야만 누군가가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셋, 그 시절 우리 참 치졸하고 나이브했지. 그래도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내 삶에 어떤 새로움이 있겠어. 넷, 도대체, 이 망할 장편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하지만 아시는지? 끝난 소설은 무조건 해피엔드이다. 2019년 늦여름

상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까. 무서운 얘기를 할까 아니면 우스운 얘기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슬픈 이야기로 할까.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한다. 무섭고도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 그래서 할아버지는 무서운 도깨비가 우습게도 똥간에 빠지는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던가 하는 줄거리이다. 소설을 쓰는 중에 가끔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때 나는 실컷 웃으면서 읽고, 다 읽은 뒤에는 어쩐지 슬퍼지며, 그 웃음과 슬픔이 만든 좁은 틈 속에 내던져진 채로 불현듯 무서움을 느끼는 그런 소설을 쓰려고 했다.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새의 선물

“개정판을 내기 위해 처음으로 전체를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을 쓰던 시절의 내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때 나는 그동안 믿어온 것이 다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위축되어 있었다. 방치되었고 무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수행해야만 하는 일상은 매일 어김없이 닥쳐왔다. 밤이면 지치고 찡그린 얼굴로 가계부를 쓰며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 돼야만 했으므로 더이상 사랑을 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농담을 잘하던 시절이었다. 불행과 고독에 대한 태연한 농담들. 그것은 그때의 나에게 허용된 일종의 패기였다. 간절할수록 건조하거나 삐딱하게 말하곤 했는데, 내가 나에게 먼저 신랄하면 불운이 나를 좀 봐줄까 싶어서였다. (…) 나의 이십칠 년 전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본 기분. 그것은 뭐랄까, 내 삶을 개정판으로 편집해보는 상상을 하는 가운데, 그것을 수행하는 건 결국 나라는 걸 깨치는 순례 같은 것이었다. 삶을 다르게 쓰고 편집했어도 나는 결국 이 자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사랑했던 존재들과 함께.” _‘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소설 한편을 쓰고 나면 이로써 또 한번 한국문학을 빛내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텐데 다만 가까스로 한가지의 고독을 이겨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잠깐이나마 낙관적이 되는데, 그때 짓게 되는 안도의 웃음이 바로 소설 쓰는 체력이 돼주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기분이 좋았던 시절에 소설을 많이 썼던 듯싶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소설가는 행복할 때 소설을 잘 쓴다. 기고만장하면 더 잘 쓴다고 본다. 게다가 이제 나는 잠시 진지한 생각에라도 빠져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서 요즘 얼굴이 안 좋아졌다며 건강을 챙기라고 걱정해주는 나이이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웃지 않으면 자칫 표정에 풍상이 엿보인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영화관에서나 식탁에서나 책상 앞에서나 일부러 큰 소리로 웃기로 결심했다. 소설 속에서도 역시. 이번 소설집에 그 여정이 조금쯤 보이는 듯하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지난 이 년 동안 쓴 소설을 책으로 묶는다. 나의 열다섯번째 책이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서툰 마음일까? 꾸준히 해왔던 일이고 앞서 책을 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굳은 얼굴로 바지에 손바닥의 땀을 문질러가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불현듯 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소설들이 나의 편견과 조바심을 자백하는 반성문인 셈이라서 내가 용서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애써 내가 아닌 척했지만 네 편의 소설 모두에 내 독선적 진지함의 동선이 그대로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썼듯이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이 위축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공감하려고 애쓰기를 바랐다. 고독 속에서 연대하기를 바랐고. 그러니 이 반성문을 쓸 때의 내가 진심이었기를, 그것이 삶과 책의 판관들에게 무사히 전해져 내가 사면을 받고, 쓰는 자로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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