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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구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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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끝나지 않은 전쟁 6.25>

구자룡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과학부 사회부 경제부 국제부 오피니언팀 기자와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2005년 중국 연변과학기술대에 1년 연수한 뒤 2008년과 2014년 두 차례 베이징 특파원에 부임해 각각 3년 4개월씩 근무했다. 2020년 경남대 대학원에서 ‘탈냉전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한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년 1월부터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 ‘중국에서 못다 한 북한 이야기’(2020), ‘마지막 황제 푸이와 다섯 여인’(2021), ‘바이든 시대 전문가 진단, 기로에 선 북핵’(공저·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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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끝나지 않은 전쟁 6.25> - 2023년 11월  더보기

서울 신촌을 오가는 버스에서 ‘연희 104고지’ 정거장을 문득 본 적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5월 초 지인 2명과 함께 찾아가 보니 주택가 뒤편으로 난 비탈길 입구에 빨간 글씨로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104고지 전적비’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작지 않은 공터 한쪽에 전적비가 우뚝 세워져 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탈환을 위한 해병대의 경인지구 작전 지도가 소개되어 있었다. 인천상륙 이후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할 때 두 번 뺏고 뺏기는 육탄전 속에 최후의 고비였던 연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기자가 근무하는 서대문 충정로 사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올해가 ‘정전 70년’이라지만 6·25 전쟁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니고 연희고지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미국에서 6·25는 오랜 기간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6·25가 몇 년에 발생한 것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져도 되는 전쟁인가? 6월 초부터 동아닷컴에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시리즈를 연재한 이유 중 하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6·25 전투 현장의 전적비, 위령비, 충혼탑, 충혼비, 기념관, 박물관 등 흔적을 찾아다녔다. 처음 찾아간 곳은 6·25 발발 후 한국에 처음 파병된 미 보병 24사단 선발대 ‘스미스 특임부대’가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인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평화공원’. ‘초전기념관’이 있다는 이곳에 가면서 ‘전투가 있었던 곳의 돌덩이(기념비, 충혼비 등)’를 본들 당시의 복잡했던 전황을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자료를 하나라도 더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기념공원의 시계탑 조형물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으로 발돋움했다. 최강을 자부했던 미군이 한반도 북쪽의 ‘공산 괴뢰 집단’의 군대와 만나 첫 전투에서 버틴 시간이 6시간 반에 불과했음을 시계탑 조형물이 보여주고 있었다. 죽미령 평화공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영감과 상상력이 마음을 휘어잡았고 ‘현재를 찾는 과거로의 긴 여정’에 나서게 해줬 다.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국가수호 현충시설’은 1312건이다. 독자들이 가까이에 있는 어느 한 곳이라도 들러 6·25에 관심을 갖는 실마리를 찾기를 기대한다. 전투와 상처의 흔적을 찾아 현장을 갈 때마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대표적인 곳이 ‘현리전투 위령비’였다. 강원도 인제의 한 마을 뒷산을 오르는 듯한 산길을 따라 올라 위령비를 보았을 때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투에서의 참혹한 패배로 전사한 장병들을 화장한 곳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는데 영령들이 주위에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경기도 가평의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 글로스터 대대가 사실상 옥쇄하며 중공군을 저지했다는 내용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추모공원에서 귀환한 병사가 부인과 딸을 만나 포옹하는 장면의 벽화를 보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벽화처럼 그렇게 돌아가 가족을 만난 병사는 사실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6·25전쟁 3년의 전황을 분석하는 많은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미군에 비해 한국군이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데다 기강도 엉망이었다. 실전 경험과 지도력을 갖춘 장교가 거의 없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공중증恐中症으로 중공군만 보면 달아나기 바빴다. 미군이 제공한 고가의 무기와 장비도 내팽개쳐 중공군 손에 넘어가게 했다. 중공군은 미군 아닌 중동부 전선의 한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등등. 이번 시리즈 취재차 현장을 다니면서 그게 다는 아니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경기도 의정부 축석령을 지키던 2사단과 육군포병학교 교도대 등은 북한 T-34 탱크와 만나 50m까지 근접해 포격을 가했다. 곡사포 사격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접포사격은 육탄 돌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전 직후 홍천 전투에서 6사단 19연대 11명의 육탄돌격대는 수류탄만 들고 적의 전차를 타고 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휴전협상 중 고지전 혈전이 벌어지던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 30연대의 3용사는 수류탄을 들고 적의 기관총 진지에 들어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잘된 것은 미군 탓, 안 되면 한국군 탓’ 하는 미 8군 사령관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백 장군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의 잘잘못을 기록해 귀감으로 삼으면서도 열악한 상황 속에서 분투했던 국군에 대해 애틋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도 됐다. 베이징 특파원 시절 김정일의 방중이나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북-중 관계에 변화 조짐이 보일 때 접경 도시 단둥에 종종 갔었다. 단둥 시가지 뒤편 잉화산에 세워진 항미원조기념관에도 들렀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 취재차 단둥에 가서 과거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단둥은 북-중 교역의 최대 관문일 뿐만 아니라 6·25전쟁의 상흔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단교(斷橋)’ 위에 중공군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하는 장면의 조각상,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세웠던 부교의 흔적 등이 즐비했다. 6·25 이후에도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끝나지 못한 데는 단둥에서 뚜렷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중공군의 참전과 무관치 않다. 한중 수교 30년이 지났으나 중공군의 ‘정의롭지 못한’ 6·25 참전의업보는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본서로 재정리된 동아닷컴의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시리즈를 진행하는 동안 기사를 손 봐서 온라인에 올려준 동아일보 디프런티어센터의 이성호 센터장과 이원주 팀장에게 감사드린다. 센터의 홍진환 기자는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드론 촬영해 주고 중국 단둥까지 동행해 주었다. 6·25의 전황과 전선의 배치 등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지도와 그래픽을 제작해 준 동아일보 뉴스디자인팀의 권기령 부장에게도 큰 감사를 전한다. 김기용베이징 특파원은 베이징의 군사박물관과 단둥을 취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재단 윤융근 기획위원은 파주 설마리와 연천 태풍전망대 취재에 동행해 주었다.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오류를 지적해주고 격려해 준 몇몇 6·25 전문가 독자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참고로 ‘중국’ 국가명 표기와 관련 다소 혼재되어 있음을 알린다. 지금은 ‘하나의 중국’이지만 6·25 전쟁 당시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유중국(대만)이 있었다. 전투와 전쟁을 묘사할 때는 중공으로 표기하면서도 중국으로 쓰기도 했다. 자유중국은 대만으로 표기했다. 책으로 묶으면서 시리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한미동맹 체결 3단계 오디세이아’를 추가했다. 6·25를 끝내는 정전협정은 한미동맹조약 체결이 가시화하면서 마무리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인용한 출처는 동아닷컴 시리즈에서는 세세히 밝혔으나 본서에서는 각 장의 끝에 참고문헌 목록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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