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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박팔양

출생:1905년,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 (사자자리)

사망:1988년

최근작
2016년 6월 <모단 에쎄이>

박팔양

1905년 8월 2일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8세 때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6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후일 카프의 주도 세력이 되는 박영희, 김기진, 김복진 등을 동급생으로 만났고 송영, 박세영, 나도향 등과 교류했다. 박팔양이 프로문학을 지향하고 후에 카프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여기에서 형성된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박팔양은 ≪요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정지용, 김화산과 교류하게 되면서 정지용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김화산의 다다이즘적 경향을 섭렵하며 다양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23년 <신(神)의 주(酒)>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등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해당 작품의 작가 박승만이 박팔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박팔양은 1924년 4월 경성법전 졸업 후 1925년 6월까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지냈다. 이후 북에서 문학 지도자로 활동하기 전까지 박팔양의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종사하고 있던 언론계는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박팔양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25년 8월 23일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의 일원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입했다. 박팔양의 카프 탈퇴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사실이 없고, 1927년 제1차 방향 전환 직전이라는 주장과 1930년 볼셰비키화로서의 제2차 방향 전환 직후라는 설 등 두 가지 대표적인 가설이 회자된다. 최근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두 번째 가설로, 박팔양의 작품 세계가 1930년 후 프로 시와 확연한 거리를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어 동의를 얻고 있다. 이 시기는 카프 내 강경파인 박영희를 중심으로 윤기정, 이북만 등이 프로문학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프로문학 작품의 예술성이 거의 사라져 가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사상성과 예술성의 절충을 위해 고심해 온 박팔양이 이 시기 카프에서 탈퇴하게 되었다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1931년 11월 중외일보가 중앙일보로 재창간될 때, 박팔양은 창간 사원으로 참여해 사회부장을 맡고 그 후 1937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했다. 이때 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는 박영희가 재직했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로 개제된 후에는 이태준이 학예부장을 맡았다. 이태준은 정지용과 함께 구인회를 주도했던 인물로, 정지용, 이태준과의 교류와 문학적 교감은 박팔양을 구인회에 가담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로 작동한다. 1934년 6월 박팔양은 구인회에 가입했다. 구인회는 반카프적 성격을 지니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모임이었다. 하지만 이 모임에서 중심인물이 아니었던 박팔양은 1936년 탈퇴하고 1937년 만주로 건너가서 만선일보에 입사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염상섭이었고 박팔양은 사회부장 겸 학예부장으로 영입되었다. 1939년에는 만선일보의 간도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된다. 만주국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만선일보 재직과 함께 최근 친일 단체인 협화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여부에 관한 논란도 있다. 1940년 해방 전 그의 유일한 시집인 ≪여수 시초≫를 박문서관에서 발간했다. 당시 강화된 검열제도에 의해 작품이 누락되거나 개작된 시가 다수 실렸다. 그는 일제의 극심한 한글 탄압이 있었던 해방 이전까지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평북신보와 공산당 평북도당 기관지인 바른말 신문사의 편집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에 좌익계 신문인 정로의 편집부장을 지냈다. 1947년 정로가 로동신문으로 재창간된 후 박팔양은 부주필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 참가해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7년 해방 전후 작품을 모아 ≪박팔양 시선집≫(문화전선사)을 펴냈다.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조선어문학부 교원과 신문학 강좌장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종군 작가로 참전해 공로메달 및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1951년 김일성대학에 복직해 1954년까지 근무하고, 1954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된 뒤, 1956년에 이 동맹의 중앙위원, 중앙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시분과위원회 위원, 남조선문학연구 분과위원회 위원, 문학신문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1956년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해방 후 작품을 중심으로 ≪박팔양 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을 펴냈다. 1958년 1월 조·쏘친선협회 중앙위원으로 문화예술단을 이끌고 구소련, 폴란드 등을 순방했고, 같은 해에 조옥희의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 서정서사시집 ≪황해의 노래≫(동 출판사)를 펴냈다. 1959년 ≪박팔양 선집≫에 전후 신작 30여 편을 보충해 ≪박팔양 시선집≫(동 출판사)을 냈고, 1961년에는 김정아의 항일 무장투쟁을 그린 서사시집 ≪눈보라 만 리≫(동 출판사)를 출간했다. 1966년 한설야가 숙청당한 후 1967년 반당 종파 분자로 몰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1년에 복권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1988년 10월 4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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