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노비 소송이 나옵니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에 관한 송사가 매우 많았습니다. 임금이 넌더리를 낼 정도였지요. 그 까닭으로는 우선 천민의 수가 엄청났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글쓴이가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조상이 노비였던 분은 손들어 보세요,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모두 까르르 웃을 뿐, 물론 손 올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3분의 2까지 보는 학자도 있다고 말해줄 때면 놀라는 기색이 완연합니다. 노예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일생동안 상전에게 재화와 노동을 바치는 알짜배기이지요. 이 시기 부의 척도는 거느린 노복들의 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문대가라 불렸던 집안에는 수백 명의 노비를 자손에게 분배하는 상속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옵니다.”
“노비제 사회란 주인의 입장에서는 좋겠지만, 노비로서는 참으로 벗어나고 싶은 질곡의 굴레입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신분 해방을 꿈꾸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실행에 옮기려 합니다.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억압이 치밀하다면 이런 사단이 적긴 하겠지요. 하지만 어느 세상에나 구멍이 있습니다. (중략)
1586년의 어느 따뜻한 봄날, 나주 동헌 아래서 이지도와 다물사리가 벌이는 소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절차를 통해 당시의 체제가 빚어내는 반목 양태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