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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박지웅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9년, 대한민국 부산

직업:시인

최근작
2021년 12월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라일락을 쏟았다 올겨울, 눈과 나비가 뒤섞여 내리겠다 2012년 12월

나비가면

저세상과 섞여 있는 이 세상의 해안선으로 밀려오는 가면들 그중에 하나를 쓰고 살아간다 이 삶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시달리기는 해도 행복하게 견디고 있다 그쪽만이 아니겠으나 남쪽에서 혹은 나비 쪽에서 빌려온 구절들을 제 살던 하늘땅으로 돌려줄 때가 되었다 내려놓으면 날아갈 것이다 2021년 8월 박지웅

너의 반은 꽃이다

개정판 시인의 말 옛 시에 찍힌 마침표를 뺐다 수북하게 나왔다 개정판 판형에 맞추어 일부 작품의 행과 연을 바꾸었고 졸시 「다시는 희망과 동침하지 않는다」는 초판에 남기로 했다 그밖에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들은 모자란 대로 생긴 대로 초판 원고를 살려 실었다 첫 시집 복간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어준 문학동네에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첫째가 돌아왔다, 만세! 2021년 11월 박지웅

너의 반은 꽃이다

나는 바란다. 이 시들이 내가 잃어버린 것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와의 작은 소통이기를. 그리하여 미래를 향해 띄우는 이 서툰 질문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내가 해로운 바이러스가 아니라 흙을 회복시키는 뿌리혹박테리아 같은 발효균의 삶을 살기를.

너의 반은 꽃이다

초판 시인의 말 ‘마당 깊은 집’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대청마루에 앉아 곰방대로 하루 여든 대의 담배를 태우시던 곳. 어머니가 처마에서 받은 빗물로 빨래를 하고 이웃과 몇백 포기의 김장을 담그던 곳. 집 뒤뜰에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장독이 있었는데, 가끔 소금 심부름을 할라치면 소금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간장독이나 젓갈독, 김칫독을 들쑤신 다음에야 플라스틱 바가지에 소금을 퍼 갈 수있었다. 큰 빈 독은 어린 나에게 놀이터였고 신나는 나라의 입구였다. 나는 또 뒤뜰 감나무를 타고 자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느 해 늦은 봄, 그 기와지붕에 올라앉아 마당 한가운데에 선 라일락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생각했다. 나무와 결혼할 수 있다면, 나는 라일락과 하겠노라고. 옛집 지붕에서 마주본 라일락은 면사포를 쓴 오월의 신부였다. 그곳을 떠난 지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이 지나, 어머니는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동래구청 앞에 몇 남지 않은 한옥이다. 생각하건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생태적 미숙아다. 그런 나에게 저 동래 옛집은 분명, 한줌 흙이다. 옛 생각에 잠겨 부산으로 향하는 내내 행복했다. 자정이 훨씬 넘어 들어서는 옛집,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부엌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는 마치 한 번도 그 방을 떠난 적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부엌방에는 제법 큰 다락방이 딸려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문청 시절을 보냈다. 다락에서 고양이와 잠들고, 전혜린을 읽었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글을 쓰고, 사랑을 했다. 큰방에 들어서니, 경대 위에 아버지가 계시다. 바깥세상을 떠도는 사이에 우리는 아버지를 잃었다. 고양이를 잃고, 사랑을 놓았다. 구석구석 돌아보니 집도 꽤 늙고 변했다. 대문 옆에는 공동화장실이 생겼고, 대문은 등꽃 대신 녹슨 쇠창살을 머리에 쓰고 있다. 라일락이 있던 자리는 할머니 한 분이 사는 단칸방이 되었다. 수줍던 내 오월의 신부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살아가다 문득, 도시 바닥에 암매장된 ‘흙’을 본다. 도시의 나무들은 흙에 뿌리를 내렸다기보다는 그 위에 꽂혀 있다. 우리가 봉쇄한 땅에서 저 나무들은 살아간다. 도시 속에 마련된 녹지는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을 연상케 한다. 아마도 저 나무는 나의 다른 이름이고, 저 인디언 구역은 우리 문명의 유배지일 것이다. 나에게 진정 ‘흙’이었던 것들이 있었다면, 저 동래 옛집과 라일락과 사람/가족이다. (또 있다. 옛집 근처에서 이모가 하던 흙다방과 그 동네에서 제일 예쁜 레지들. 그 흙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바꾸어 말하면, 라일락에게는, 우리가 실종된 셈이다. 사람이 먼저 흙의 성분을 버리고 물질로 변질했다. 우리가 변절했다. 나는, 나무가 방이 된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빌딩 안에서 나무를 기르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된 이 사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 또한 거들었던 일이다. 그것은 자연과 사람의 공존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육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물질문명과 공범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내상이다. 여기에 실린 내 시의 일부는 내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유기한 것들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이며, 여러 번의 각서이다. 동래 옛집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은 나에게 있어 문명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이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가진 생태적 삶은 흙 한줌뿐이다. 문명의 눈을 찾아내 거기 뿌릴까. 아니다. 쓰고 보니 공포탄이다. 그냥 각서에 싸서 지니고 살아야겠다. 그리하여 나는 대신 이 문명이 쓰고 버린 것에 주목한다. 문명의 고아들과 속도가 긁고 간 상처와 깨어진 계절과 거대 도시의 톱니바퀴에 으깨진 아버지로서 고발/응전한 것이 이 시편들이랄 수 있다. 도시의 생활쓰레기가 된, 버림받은 것, 잡으면 녹는 것, 으깨어진 것들은 오히려 힘이 좋다. 그것이 이 시대의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란다. 이 시들이 내가 잃어버린 것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와의 작은 소통이기를. 그리하여 미래를 향해 띄우는 이 서툰 질문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내가 해로운 바이러스가 아니라 흙을 회복시키는 뿌리혹박테리아 같은 발효균의 삶을 살기를. 그리고 또 바란다. 어느 먼 훗날, 기와지붕에 앉아 흰분홍빛 면사포를 쓴 그 오월의 신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2007년 12월 박지웅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물방울 속으로 나비가 들어갔다 당신을 찾느라고 이 모두 그곳에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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