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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근이

출생:1941년 (쌍둥이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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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사공의 뱃노래>

사공의 뱃노래

내가 어릴 적부터 몸에 배어든 바다 냄새가 내 진국이 된 듯하다. 나는 일찍이 어부가 되었고, 영일만에서 야간 유자망조업을 하는 배에 선원으로 올랐다. 나이 많은 어른들 틈에 끼어서 바다 일과 배를 운전하는 사공 일을 열심히 배우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후 네 시가 넘으면 장화를 신고 책을 옆구리에 끼고, 어머니가 넘겨주시는 도시락을 들고, 어젯밤 작업에서 돌아와 집 앞 물가에 닻을 내렸다. 배를 띄워놓은 바닷가 자갈밭에 앉아 선원들이 집으로 들어가 밤에 못 잔 잠을 보충하고 작업 준비를 하여 시간에 맞춰 나오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먼바다를 내다보면서 오늘 밤 작업에서 고기를 잡을 생각보다는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시어를 낚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나의 생활이고 나의 시의 학습이었다. 나는 일찍 학교를 포기하고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다. 중학교 일학년에 세 학교를 거치면서 이학년 교실을 밟아보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후가 되면 혼자서 이웃에 있는 초등학교 일학년 교실을 전세를 내듯 하여 교실 구석진 자리에서 독학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일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 세월도 잠시 4, 5년 후 나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그 당시 소문난 사공 어르신을 따라 바다로 갔다. 그러나 그때도 역시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책은 버리지 않았다. 책이 중학생 교과서에서 소설책이 아니면 시집으로 바뀌었다. 그해 돈은 벌지 못했지만, 사공 어르신으로부터 ‘용왕의 아들’이란 별칭을 받았다. 그런데 가을이 오면서 연안에서 너무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따라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속초까지 오징어잡이를 갔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돈을 벌어와 어머니에게 드렸고 끝내 그 돈을 받은 어머니는 울고 말았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일은 열심히 배우고 돈은 열심히 모았다. 마침내 24살에 내 배를 만들었고 선주가 되어 직접 배를 몰고 다니며 조업을 하는 사공이 되었다. 2002년도에 첫 번째 시집을 시작으로 세 권의 시집을 만들었다. 첫 번째 시집은 어쩌다 방송에 나가면서 세 번이나 책을 찍어서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첫 시집 『찔레꽃 피는 날과 바람 부는 날』은 책이 많이 나갔다. 내가 나가던 시인협회를 통해 이름있는 시인들에게 알려졌다. 이후 세 권의 시집을 출간, 서점에는 내지 않았고 대부분 우편으로 지인들과 이름있는 작가들에게 보냈다. 이번에 올리는 시들도 오래전에 쓴 것이 많고 근간에는 자서전과 수필집을 내느라 시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마도 이 시집이 내 생전 마지막 출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많이 쓰진 않았지만 내가 쓴 작품 속에는 내 삶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내 삶을 벗어나서는 작품이 제대로 구성되지를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내가 살아온 생활 전선이 좁고, 평생을 오로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몸으로 익히고 머릿속에 담아 오면서 집중했기 때문인 것 같다. 짧게 쓴 시 속에도 나의 삶이 묻어 있고, 웃고 돌아서는 이별 뒤에도 가슴 한곳이 저리도록 상처를 남겼다. 독자분들께는 내가 쓴 작품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말고 마음에 보이는 것만 읽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서 김근이

영혼으로 사는 아이

머리말 내가 유소년기를 지나오면서, 경험해온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슬프지 않은 삶이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체험한 어려움이 배고픈 것이었고, 다음으로 외로움이었다. 좀 더 성장하면서는 슬픔이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의욕마저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세 가지의 아픔이 없는 삶은 보편적인 인간의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난은 배가 고팠고, 외로움은 마음을 메마르게 했다. 그리고 슬픔은 마음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를 세 곳이나 기웃거리고도 이학년 교실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포기한 것이, 내 평생에 죄를 지은 것 같아 항상 남의 뒷전을 기웃거리게 했다. 삼남 이녀의 오 남매 중 막내였으면서도 수시로 빈 집에 혼자 남는 시간은 나의 성장까지도 멈추게 했다. 세 살 때 다친 발목의 통증으로 인한 나의 고통보다, 어머니 평생에 마음의 고통을 드린 불효자가 되어서 살게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당신의 자식이 부모를 잘못 만나 장애인이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막내를 떼어놓지 못하고 옆에 끼고 살았다. 나는 또한 어머니의 그 정성을 멀리 둘 수가 없어 나는 평생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팔자대로 살라던 말씀이 어린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무엇보다 가난에 빼앗겨버린 내 어린 꿈은 바닷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 꿈을 찾아 바닷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헤매고 살았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외로움을 안아 주던 여인의 가슴에 어린 영혼을 묻어두고 은혜로움에 끝없는 감사를 보냈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는 내 영혼을 봄날에 솟아오르는 새싹처럼 거친 발걸음에 밟히지 않게 가꾸어준 그 사랑을 시혼으로 받아 시인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을, 나는 살아오면서 생각날 때마다 잊지 않고 감사를 보낸다. 이별이 주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그토록 애절하게 바라보던 어머니 곁을 떠나 죽음의 턱밑에서 느낀 생명의 애착에서,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기에는 너무도 불쌍했던 어린 영혼을 끌어안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백번 천번 찬사를 보낼 일이다. 이름난 사공 어르신이 내게 알려 주신, 네가 용왕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일 톤짜리 작은 돛단배를 시작으로 영일만을 생활의 터전으로 시작한 어업에서 여러 번 있었던 풍랑 속에 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용왕님이 나를 지켜 줄 것이란 막연한 자부심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평소에 은근하게 품고 있었던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절망 속에 빠져 자칫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어려운 순간에서 올망졸망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날 나 스스로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그날을 돌아보며, 내게는 아직도 바다가 있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더는 욕심 내지 않고, 바다가 주는 내 몫만큼 거두어들이는 착실한 어부로 살았다. 무거운 빚에서 벗어나던 날, 그렇게 좋아하던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다 풀어주지 못한 채 먼저 보내 버린 아내와의 이별은 내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가 짜놓은 노후의 계획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내가 할 일이라고는 아내의 영상을 안고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내게, 이 글을 쓰게 해 준 우리 막내가 한없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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