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촌놈, 글을 쓰는 작부가 될래, 아니면 시인이 될래.”
첫 시집을 내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다 참가한 바닷가 문학 행사에 강원도를 대표해서 시 낭송 초청을 받았었다. 한껏 기세를 올리며 시 낭송을 하고 뒤풀이를 끝내고 숙소에 누워있던 나를 찾아온 생면부지 원로급 시인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이미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발음마저 꼬일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 것처럼 보였다.
“문학은 이런 거창한 행사에 있지 않고, 네가 사는 사람들 속에 있다. 작가 되려면 당장 돌아가서 문단에 기웃거리지 말고 분단의 상징인 철원에 처박혀 너만의 글을 써라.”
그 대성일갈(大聲一喝)에 나는 원로 시인의 눈을 바라봤다. 단호한 그의 눈빛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고 문학 초년생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선배의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원로 시인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돌아갔지만 나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늘 끝처럼 가슴을 찌르는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무작정 숙소를 나와 바닷가 백사장을 밤새도록 걸으면서 원로 시인의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 백사장에 놓여 있었던 벤치에 앉아 현대문학에 비해 볼품없어 보이는 내 시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을 했다. 도회지 풍의 글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내 글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것이 원로 시인이 나 같은 철부지에게 바랐던 간절한 기대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 깊은 사랑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었다.
그날 이후 나는 문학 행사에는 발길을 끊고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대부분 실향민인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가만히 옆에서 들어 주고 있다. 문학은 힘없는 사람들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라는 생각이다. 지금도 가끔 힘이 들면 강원도 촌놈인 나에게 문학의 길을 인도해준 대 원로 시인의 말을 떠올려본다.
“강원도 촌놈, 글을 쓰는 작부가 될래, 아니면 시인이 될래.”
2023년 6월
나는 어머니 자장가보다 폿소리 총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지뢰밭, 비무장 지대, 노동당사로 대표되는 6.25의 참혹한 전쟁 잔해와 군인들의 훈련받는 소리, 새벽마다 들리던 대남 방송 등에서 느끼던 무장평화의 불안한 현실 여건이 내 시의 기본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고있다고 생각된다.
주인 없는 묵정 밭을 개간하다 지뢰에 발목이 끊어지던 어른들과 폭팔물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친구들을 이웃으로 살아온 내게는 지역 아픔 하나 하나가 시적인 뿌리로 남아 있다. 그 시절 황량한 수복지구에서 목숨을 걸고 삽을 들었던 우리들의 아버지와 호미를 잡았던 어머니들 아픔을 제대로 썼을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용기를 내어 지역적 정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을 위주로 책을 묶어 보았다.
현대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이미지를 구사하는 문학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속에서 분단이나 수복지구 아픔을 느끼는 분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00년 12월 12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
열다섯 살 봄이었던가.
우리 집에서 자취하던 친구가 자신이 살고 있는 대마리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지뢰 사고로 다리 잘린 아버지,그리고 철책이 없어서 북한 병사가 내려온다는 곳, 해가 떨어지면 검문소에 갇힌 육지 안에 섬 같은 땅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작가가 된다면 세상에 꼭 남기고 싶다는
다짐을 했었다. 어줍지 않게 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대마리를 시집으로 출판할 수 있어서 묵은 숙제를 푼 것 같다.
-2020년 11월 철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