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이번엔 작정하고 '내' 이야기들을 좀 써보았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 말이,
당신에게는 미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인류평화를 위해 장가를 갑니다.
인류평화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해준 여자친구에게,
전(全) 인류를 대신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평화로워진 지구에서, 또 만납시다.
세상 모든 소설은 다 연애소설이라고 하던데, 나에게 그건 ‘연애’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 말이라기보단 ‘소설’을 쓰는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들린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끼는 마음이 절반이니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람을 본 적 없거니와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다는 사람도 만나본 적 없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다 보면 다 망해버리고 마니까. 그건 그냥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니까. 장소든 시간이든 단어든, 아끼는 사람이 글을 쓴다. 매일 글로 쓰다 보면 아끼는 마음이 들게 된다.
어쩌다 보니 짧은 소설만 벌써 세 권째다. 5년째 한 달에 두세 편씩 꼬박꼬박 짧은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매번 무슨 백일장을 치르는 느낌이다. 백일장은 쓴 사람 이름을 가린 채 오직 글로만 평가를 받는 법. 그 마음으로 계속 근육을 단련하고 있다. 이름은 지워지고 이야기만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짧은 소설은 대체로 섬광처럼 나타나는 ‘순간’이나 ‘사건’에 집중하기 좋은 장르이지만, 아무래도 ‘인물’에 대해선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 단점을 돌파해보고자 지난 5년 동안 소설 속 두 인물, ‘전진만’과 ‘박정용’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기록한 것은 그 친구들이 아닌, 그 친구들의 ‘흐르는’ 시간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겨우 그것만 할 수 있었다.
그 친구들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게 될지, 나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실제로 우리집에서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이 이시봉이다.
이시봉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이야기 하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만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소설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강아지를 둘러싼 인간의 책임을 묻기엔, 여전히 유효한 장르이다.
꽤 오래전부터 「욥기」의 후속편을 쓰고 싶었어요.
젊었을 땐, 아무 죄 없이 죽어간 욥 자녀들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이어 쓰고 싶었죠.
제가 읽은 구약 속 욥은, 자신의 자식들이 고통 속에서 죽은 뒤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이상한 아버지였어요. 하지만 정작 자신의 발바닥에 악창이 나자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인물이었죠. 저는 이 아버지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어요. 뭐, 이런 아버지가 다 있나? (……)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된 후에도 여러 번 「욥기」를 읽었는데, 그때도 욥이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어쩜 이리 쉽게 굴복할까? 그리 기세 좋게 하나님과 맞짱 뜨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하나님을 실제로 한 번 보고 나더니, 바로 회개, 용서받고 축복받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죠. (……)
계속 그런 마음뿐이었다면, 아마도 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겠죠. 지금은 좀 생각이 많아졌어요. (……) 어쨌든 욥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이니까요. 그 마음을 안다고, 이해한다고,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순 없는 거죠. 욥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책이 아닌 할머니에게서 처음 이야기를 배운 사람이다. 불 꺼진 어두운 방에 누워, 조곤조곤 할머니가 해주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씨앗이 되어 몸속에서 폭죽처럼 발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로, 거기에서 다시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로 변모한다는 사실. 이효석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배운 것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가 더 많은 이야기로 세포 분열처럼 퍼져 나가는 힘. 그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 수상소감에서
어느 책에선가 자살한 문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지금, 그 문어의 어지러운 다리가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돌아보니 지난 오 년, 내 삶의 궤적이 꼭 그 꼴이었다. 해산되어버린 서커스단의, 그리 신통치도 않고 게으르기까지 한 문어. 심수봉 누님의 전언처럼 '사랑밖에 모르는' 문어. 그 문어의 혼잣말이 바로 여기에 묶인 소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