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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이광호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3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

직업: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최근작
2023년 1월 <[세트] 토리노 멜랑콜리 + 경험이 언어가 될 때 + 장소의 연인들 - 전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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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래

이 책은 왜 씌어졌을까? 이 책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에 대한 작은 탐색이다. 이를테면, 사랑에 관한 1인칭의 고백과 2인칭의 대화와 3인칭의 묘사가 공존할 수 있을까, 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와 에세이적인 사유는 어떻게 교차할 수 있을까,와 같은 헛된 시도 말이다.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과 에세이적인 것이 뒤섞인 글쓰기를 향한 무모한 동경은 오래되었다. 이것은 또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소란 사유의 궤적이다. 여기, 사랑을 둘러싼 문장들은 사랑의 매혹이 아니라 무기력감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 진부하고 상투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어쩌면 여기에서 사랑을 둘러싼 40편의 공허와 1편의 기이한 위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를 흔들었던 날카로운 가시 같은 문장들을 빌미로 이 이상한 글쓰기는 시작된다. 이 글을 ‘허구적인 에세이’ 혹은 ‘픽션 에세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이야기의 주인공과 글쓰기 주체의 얼굴과 이름이 지워진다는 의미에서 ‘익명의 에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와 ‘그녀’는 복수의 ‘그들’이거나 혹은 ‘당신들’이거나 ‘내’ 안의 사람들이다. ‘사랑의 미래’는 사랑의 설레는 혹은 불안한 앞날을 마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혹은 사랑이란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 영원히 오지 않을 어떤 것에 대한 이상한 갈망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여기 사랑의 언어는 갈망의 언어라기보다는갈망에 대한 갈망의 언어이다. 이 책의 1부는 ‘그’의 시간 속에 있고 2부는 ‘그녀’의 시간 속에 있다. 이 두 가지 층위의 시간은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 보거나 교차한다. 그 시간 속에 얼룩처럼 뿌려진 이미지들은 모두 각각 최초의 장면이면서 최후의 장면이다. 사랑이란 그 선후를 알아낼 수 없는 이미지들의 사건이다. 사랑의 마지막 순간, 그 모든 장면의 순서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된다. 극단의 공허는 최선의 위로만큼 표현되기 어렵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랑이 하나의 관념으로 요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래도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이토록 어눌한 언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부끄럽다. 이 글들은 지난해 씌어졌다. 그 여름에서 가을 사이, 방어할 길이 없는 적막한 시간을 마주했고, 더 가난한 시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어리석게도…… <웹진문지> 연재 때 따뜻한 관심을 보여준 익명의 독자들과 앞으로 이 책을 읽게 될 미지의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이 책이 어떤 느낌을 공유한 이름 없는 공동체의 계기가 된다면 글 쓰는 자의 더할 나위 없는 영예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늦게 온 예감처럼 만날 수 있다면, 이 허술한 글쓰기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2011년 10월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이 글들을 쓰는 동안 한국 문학은 '2000년대적인 것'의 '다른 몸'을 풍부하게 드러내었고, 그것은 문학을 명명하고 구획 짓는 재래적인 방식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 낯선 움직임들 앞에서 문학에 대한 낡은 풍문들이 아직도 떠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문학의 현실 공간은 좁아드는데,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상한 문학들'의 상상적 공간은 다시 솟아오르고, 여전히 문학에 대한 저 폭력적인 무지는 힘이 세다. 그래서 중얼거린다. '근대문학' 혹은 '본격문학'에 대한 몹쓸 동경은 이제 접어도 되는지, '국가제도'와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들은 존재하는지... 한국 문학을 둘러싼 위계적 이분법들을 사소한 정치성의 '위상학'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한국 문학의 근대성 비판에 관련된 비평적 개입이 다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은 작고 일상적인 영역에서 '정치성'의 문제를 탈중심화했다. 아니, 그랬다고 나는 읽었다, 혹은 읽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읽을 수 없고, 무력한 시간의 공허를 피할 수 없으니, 이렇게 비평의 우울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호명'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다른 문학에서, 다른 삶에서, 다른 몸에서 다른 명명이 흘러나온다.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이 책은 용산이라는 장소의 특정성에 글쓰는 산책자인 ‘나’라는 익명의 실존이 돌아다닌 흔적이다. 목적 없는 산책은 이 도시의 공간과 리듬에 대한 저항이며 동시에 탐미이다. 이야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심한 걸음걸이의 동선, 장소와 이미지 들의 우연한 대면만이 있다. 장소에 대한 정보들은 ‘너’라는 부재를 향한 일인칭의 독백, 장소를 둘러싼 감각의 파편들과 어색하게 동거하게 되었다. 전달해야 할 정보들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침묵의 언어 사이의 감당할 수 없는 흔들림 때문에 이렇게 이상한 독백이 생겨났다. 이런 얼굴 없는 글쓰기를 ‘익명적인 에세이’라고 부르려 했다. 왜 하필 ‘용산’이어야 했나? 나날의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겠지만, 용산이라는 모더니티의 참혹함과 혼종성에 이끌렸을 것이다. 용산의 순결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 들은 사회적인 시간과 신체의 감각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먼 과거의 것들을 보존하려는 당위와 노력에 비해 가까운 과거인 근대의 기억들은 잊으려 한다는 것이다. ‘민족 이야기’에 대한 동경과 ‘식민지 근대’에 대한 불편함이 이런 자발적인 망각을 낳게 했을 것이나, 서울 중심부의 거대한 땅에 아직도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은 그 망각의 이유가 동시대적인 요인을 갖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용산은 애써 지우고 싶은 식민과 이식의 역사와 모욕과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인 개발을 호출하는 기이한 장소이다. 불균등한 시간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일상적 우울과 권태와 뒤섞일 때, 용산의 ‘과도한 산문성’이 만들어진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구성하는 여러 겹의 ‘식민의 시간’이 여전히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면, 참담하고 역동적인 모더니티의 장소로서의 용산은 다시 성찰의 대상이 될 만하다. (……) 원고를 정리하는 중에 너무 많은 생명들이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당했다. 용산과 세월호 사이의 서로를 마주보는 비극의 연대기와 ‘국가’의 참혹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무력감과 죄의식은 오래고 익숙한 것이나, 한 시대의 애도는 한 개인의 애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글쓰기는 피할 수 없이 애도의 제의가 될 수밖에 없다. 예정된 망각과 마비와 자기기만으로부터 끈질긴 애도를 지키는 것은 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기다림의 문제이다. 이 글쓰기가 문학 제도와 지식 영역의 관습과 경계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비애의 상투성에 저항하고 그것의 단독성과 개별성을 보존하는 것을 문학적 글쓰기라고 생각해왔다. 글쓰기는 삶의 기록이 아니라, 삶의 외부를 향하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침묵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곳곳에 부끄럽게 산재해 있을 끈질긴 자기 연민 때문에 오래 참담할 것이다. 호명하는 것조차 미안한, 가깝고 먼 곳의 이름들에게, 염치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세계에 속한 ‘당신들’에게 이 책으로 내 남루한 안부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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