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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마광수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1년, 대한민국 수원 (물고기자리)

사망:2017년

직업:소설가

최근작
2018년 7월 <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머리를 집어 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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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일기

나는 소설이 주는 재미의 본질이 결국은 ‘감상感傷’과 ‘퇴폐’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복잡한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일지라도 그런 주제의식은 ‘포장’이 될 수밖에 없고, 기둥 줄거리를 통해 독자가 얻는 카타르시스의 본질은 ‘감성을 억압하는 엄숙한 이성으로부터의 상상적 탈출’과 ‘답답한 윤리로부터의 상상적 일탈’을 통해 얻어지는 ‘감상’과 ‘퇴폐’에 있다. 거기에 곁들여 추가되는 것이 있다면 ‘과장’ ‘청승’ ‘엄살’ ‘능청’ ‘비꼼’ ‘익살’ 같은 것이 될 것이다. (…) <광마일기>는 독자가 풍경화적 세태묘사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서사적 스토리텔링이 주는 속도감 넘치는 재미를 느끼도록 씌어진 작품이다. - 작가의 말

광마잡담

나는 현대판 전기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광마잡담(狂馬雜談)을 썼다. 이중에는 옛 전설이나 설화를 패러디한 것이 많다. 이 책은 내가 몹시 우울할 때 쓰여졌다. 우울할 때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지고 자꿈 꿈속으로 잠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삶이 괴롭고 어려울 때뿐만 아니라 소설은 그 자체로 이미 '현실 도피'라고 생각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나는 ‘야하다’를 ‘천박하다’로 보지 않는다. 나는 ‘야하다’의 어원을 들야野자로 보아 ‘본능에 솔직하다’ ‘천진난만하게 아름답다’ ‘동물처럼 순수하다’의 의미로 본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게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온몸에 울긋불긋 채색을 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별거벗고 살듯이 말이다.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가볍게 수음(手淫)하는 기분으로 시를 쓰고 싶다. 시를 천박하게 만들고 싶다. 시가 어깨에 힘을 못주도록 두들겨 패주고 싶다.

돌아온 사라

요즘 들어 부쩍 길이가 긴 소설에 대한 염증이 생겼다. 스피드 시대라 그런지 과거의 장편소설들이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신문사의 ‘문학 공모’ 같은 것을 보면, 예전엔 장편소설 부문의 분량을 보통 200자 원고지 1200매로 했었는데, 이젠 800매 정도로 줄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장편소설’이라는 용어가 새로 생겨 500~600매 정도의 소설을 그렇게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 분량의 소설들을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장편소설’로 부르고 있다. 최근의 경향이 아니라 예전부터 그랬다. 프랑수와즈 사강이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은 거의가 400~500매 정도인데도, 20세기 초 부터 ‘장편소설’이라는 장르 명칭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편도 보통 20~30매가 가장 적당한 분량이라고 생각하여 여러 단편들을 써 왔다. 분량에 따라 ‘작가의 역량’을 가늠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돌아온 사라』는 『즐거운 사라』가 나온 1992년에 비해 엄청난 속도로 바뀌어 진 2010년 전후 일부 대학생들의 성관(性觀)을 경쾌하고 희화적(戱畵的)으로 반영시켜 본 소설이다. 부디 단순한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중적으로 점잔 빼는 한국 사회에 던지는 나의 화두는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이다. 여기서 ‘자유’와 ‘방종’의 억지스런 구별은 무의미하다. 한국 소설은 너무 무겁고 현학적이고 교훈적이다. 나는 ‘가벼운 소설’을 소설을 쓰기 위해 ‘의도된 경박성’을 표현수단으로 삼아 문학신성주의에 도전하려고 했다. 2011. 3. 20

로라 1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인해서 생긴 피해의식과 자기검열 의식을, 나는 이번 작품 <로라>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다. 현대인의 냉소적 삶을 그리고, 여주인공 '로라'를 중심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사건들을 '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파노라마식으로 엮어보려 한 것이다. 그러려면 냉소적인 '연애'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체를 건조하고 간결하게 하고 서술도 되도록 짧게 한 다음, 주로 '대화' 위주로 소설을 이끌어가 읽는 이들에게 '경쾌한 속도감'이라는 독서의 쾌감을 선물해 주려고 했다. 또한 수필적 요소를 가미하고 시를 많이 집어넣어, 편안한 가운데 '감상(感傷)'과 '퇴폐'의 미(美)를 맛볼 수 있도록 애썼다. 소설 기법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했다.

로라 2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인해서 생긴 피해의식과 자기검열 의식을, 나는 이번 작품 <로라>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다. 현대인의 냉소적 삶을 그리고, 여주인공 '로라'를 중심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사건들을 '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파노라마식으로 엮어보려 한 것이다. 그러려면 냉소적인 '연애'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체를 건조하고 간결하게 하고 서술도 되도록 짧게 한 다음, 주로 '대화' 위주로 소설을 이끌어가 읽는 이들에게 '경쾌한 속도감'이라는 독서의 쾌감을 선물해 주려고 했다. 또한 수필적 요소를 가미하고 시를 많이 집어넣어, 편안한 가운데 '감상(感傷)'과 '퇴폐'의 미(美)를 맛볼 수 있도록 애썼다. 소설 기법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했다.

문학과 성

'사랑'이 빠지는 문학작품은 거의 없고 사랑의 밑바탕에는 '성'이 있다. 그런데도 이제껏 문학과 성의 관련성에 관한 담론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본격적인 문학론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이 책에서 나는 정신분석학적 문학비평(또는 심리주의 비평) 이론을 주축으로 하여 시와 소설이 나타난 성심리를 분석해보고, 거기에 덧붙여 성문학 주변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검토해 보았다. '성' 이 점차 문학의 주된 소재로 부상해 가고 있는 요즈음, 문학과 성의 관련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성은 이제 문학뿐만 아니라 기타 예술장르와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문화계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엄숙주의와 경건주의는 성을 다루는 문학작품을 경시하거나 도외시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예술이냐, 외설이냐' 식의 소모적 논쟁으로 몰아가고만 있다. 이런 후진적 현실은 분명 문학의 다양성을 위축시키고 문화의 퇴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 책이 성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문학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성심리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발랄한 라라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감미로운 관능적 상상력! 내 시나 소설들은 ‘성적性的’이라기보다는 ‘유미주의적的’이다. 한국에는 유미주의(또는 탐미주의)의 역사가 없다. 김동인이 「광화사狂?師」 등의 작품에서 유미주의를 시도했지만 나이를 먹은 뒤 곧바로 역사소설로 돌아섰다. 요즘 작가들도 똑같다. 나이 50만 넘어도 쉽사리 ‘변절’을 해 역사소설(이른바 팩션), 민족대하소설 같은 쪽으로 돌아선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미주의가 없는 문학이란 겉껍데기 ‘이데올로기’에의 복종일 뿐이다. ‘아나키즘’과 ‘유미주의’가 결합할 때 진짜 예술이 나온다. 나는 ‘아름다움’에 가장 관심을 둔다.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히 ‘인공미人工美’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인공미의 핵심을 ‘페티시즘fetishism’으로 보아, 나의 페티시인 ‘긴 손톱’의 이미지를 늘 변주變奏시켜 묘사한다. 나는 이런 ‘집착’에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짧은 이야기일수록 강렬한 자극성을 지닌 내용이어야 한다! 나는 단편소설은 엿가락처럼 축축 늘어지며 지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이야기거나 이른바 ‘리얼’한 얘기여서는 안 되고, 어딘가 ‘애브노멀abnormal’하고 톡 쏘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짧은 이야기라면 거기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내용은 ‘강렬한 자극성을 지닌 내용’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랑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다! 내가 얻은 결론은 사랑은 관능적 욕망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 아무리 시대상황이 어렵고 고달플지라도 본능은 그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 행복은 오직 관능적 쾌감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먹는 문제보다도, 사랑의 문제가 우리의 모든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나는 점점 깨달아가고 있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우리가 육체적 쾌락욕구로만 가득 찼던 어린아이 시절의 야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정직한 본능으로 이중적 위선과 쓸데없는 죄의식에 가득 찬 정신을 제압하 수 있을 때, 우리는 무명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신 곧 운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이 책을 이 땅의 솔직하고 야(野)한, 그러나 행복한 운명으로부터 소외돼 있다고 느끼고 있는 착한 이웃들에게 바친다.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나는 끓어오르는 성욕을 달래기 위해서 글을 쓴다. 너무나 아파서 글을 쓴다. 쓸쓸하고 고독해서 글을 쓴다. 죽기 싫어서, 아니 죽지 못해서 글을 쓴다. 꼭 한 장르만 붙들고 늘어질 필요도 없다.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평론이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장르든간에 상관없다. 나는 무엇이건간에 쓴다. 내가 쓴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든 못 주든, 철학적 이념이나 형이상학적 계시를 내포하든 내포하지 않든, 나는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나는 그냥 '배설'할 뿐이다. ... 문학은 혼자서 하는 고통스런 배설이어야 한다. 작당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토론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 문단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 유대관계에 휘말려 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놓는 문학작품들이 고통스런 배설물이 아니라 팔려고 내놓은 수공예품들 같다. 지나치게 매스컴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유명'해지려고 애를 쓴다. 독자들에게 영합하고 평론가들에게 아부하려고 애를 쓴다. 작가는 작품을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면 그만이지 그 이상의 것을 바라거나 남들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시류에 연연해하고 매스컴이나 평론가들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가. 또 왜 그리 작가의 '품위'와 세석족 명예에 집착하는가. 작가도 물론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니 작품이 좋은 평을 받고 많이 필리기를 바라는 것이 뭐 어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밑천이 많으면 장사는 그럭저럭 굴러가게 되어 있다. 먹은 게 많으면 그럭저럭 똥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작가들 상당수는 먹은 게 없이도 계속해서 똥을 누려고 한다. 밑천도 없는데 세 치 혓바닥으로 잘도 장사를 해댄다. 시의 경우 '정직한 배설'은 특히나 중요하다. 시는 소설에 비해 변비증 걸린 환자처럼 낑낑거리며 간신히 배설해 놓은 '함축적인 똥'이다.

사랑의 학교

문학은 '상상 속'의 현실이다 작가는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문학은 상상 속의 현실이다. 특히 한국작가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리얼리즘 문학은 신문사회면 기사와 별다를 게 없다. (…) 문학작품을 가지고 현실과 비교해서는 안된다. 내가 좀 야하게 쓰면 작가의 경험담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또 그 '죄'를 추궁한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소설가는 그럼 살인을 해보고 쓰는 거란 말인가? 소설이란 기본적으로 허구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 거듭 말하지만 참된 작가는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유혹

내가 너를 유혹했는지 네가 나를 유혹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밀고 당기고 안기고 떼어지고 마치 탱고 춤과 같은 우리의 사랑 변덕스러우면서도 본능에는 허기져 매일 밤 뱀처럼 꿈틀대는 우리의 사랑 나는 네가 야해서 좋았고 섹스 로봇 같아서 유혹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나같이 볼품없는 놈에게 엉켜들었느냐 사랑이 결국은 우릴 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결국은 지쳐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전체보다 개인, 질서보다 자유이다. 이 시대는 전체주의자가 아니라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모난 돌'은 좋은 돌이므로 '정'을 맞아서는 안된다. 개성이 튀는 사람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 그래서 이 나라는 점점 더 사그라든다.

인간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이 책에 부제를 붙인다면 '인간에 대한 애증'이나 '인간에 대한 절망과 희망' 정도가 될 것이다. 그만큼이나 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헷갈려하고 있다. 인간이 과연 '만물의 영장'인지, 아니면 동물 가운데서도 '가장 추악한 동물'인지, 나는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착잡한 상념의 와중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생각들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담아보려고 애쓴 것이 이 책이다. 인간이라는 현상 자체와 그 주변에 얽혀 있는 문제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지만, 글을 정리해 나가다 보니 한국적 현실에 대한 진단과 비평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내가 겪은 일들에 관련된 체험담이 자연히 사이사이에 끼여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얘기들이 오히려 이 책에 윤기를 주어, 독자들이 친근감을 느끼며 책을 읽게 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이 책은 전에 낸 <운명>, <성애론>과 더불어 '인간론' 3부작을 이룬다. 오랜 기간에 걸친 내 나름대로의 사색과 체험을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털어놓은 나의 생각들이, 더 이상 왜곡되거나 오해되지 않고서 세상에 제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지금껏 나는 참된 자유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했지만, 나는 "자유가 너희를 진리에 도달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는 '열린 마음'에서 나오고 열린 마음은 '본성에 솔직한 마음'에서 나온다. 참된 자유는 방종을 동반하지 않으며, 자유의 결과는 바로 행복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닫힌 마음 문을 향해 계속 '열려라 참깨'를 외쳐야만 한다. 우리가 정신우월주의에 기초한 편벽된 고정관념의 틀을 과감히 깨뜨려버릴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괴리된 위선의 지옥을 벗어나 상상과 현실이 일체가 되는 천국의 문턱에 이를 수 있다.

첫사랑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다 허구적 인물들이지만,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향희, 보아, 옥수, 현나, 혜숙 등의 여성과 ‘꿈속에서의 사랑’을 나누며 한없이 해롱거리는 기쁨을 누렸다. 특히나 향희와의 애틋한 사랑은 그 짭쪼롬한 애수와 향수 어린 감상感傷으로 인해 나를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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