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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고종석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9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1년 4월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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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 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감염된 언어

이 책에서 펼친 생각은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다소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의 논지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 주제를 지금 다룬다고 해도 다른 결론에 다다를 것 같지는 않다. 적잖은 독자들이 그 글에서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읽어낸 것이 매우 당혹스러웠다. 내 한국어가 넉넉히 익지 않아 그런 오해를 빚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거기서 편든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덜 혜택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 적잖은 독자들이 그 글에서 언어정책론의 옹호를 읽어낸 것도 당혹스러웠다. 한국어 순화가 됐든 영어 공용이 됐든, 나는 국가 차원의 적극적 언어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을 그 글에서 분명히 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에 대한 비판이, 그와 전혀 다른 층위에서라면, 우아한 절중을 움켜쥐며 한결 미묘한 생각거리를 내게 던져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세대의 복지를 위해, 이 순간 숨쉬며 살아가는 현재 세대가 불편과 불이익을 겪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물음의 층위 말이다.

국어의 풍경들

이 책에 묶인 글들의 일부는 98년 가을부터 99년 봄까지 한겨레에 연재된 것이다. 물론 이 글들의 소루함은 신문 지면의 제약 탓이 아니라 내 능력과 정성의 제약 탓이다. 방랑하는 아비의 소맷자락에 이끌려 이리저리 떠돌다가 문득 모국어가 설어져버렸을 두 아이에게 이 책을 준다. 그 아이들이 이 책을 기꺼이 받아줄까? 그러기를 바란다.

말들의 풍경

앞선 책들이 대체로 그랬듯, 이 책도 체계적인 언어학 교과서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또는 언어학적)에세이다. 언어를 안에서(언어학의 틀로) 보는 관점과 바깥에서 (사회적, 심리적 또는 정치적 틀로) 보는 관점이 뒤섞여 있다는 점도 앞선 책들과 같다. 앞선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엔 (기록된) 텍스트들에 대한 논평이 더러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 텍스트들은 순문학 텍스트인 경우도 있고, 넓은 의미의 비평 텍스트인 경우도 있다.

모국어의 속살

사람의 생김새는 포유류 가운데서도 사뭇 볼품 없는 편이고, 생태계 전체를 놓고 보면 더욱더 그렇다. 사람 모양새의 그런 미적 열등은 너무나 두드러져서, 어지간한 액세서리로는 그것을 가릴 수 없다. 이를테면, 가락지나 브로치로 몸을 치장해봐야 사람이 공작새나 장미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공작새나 장미보다 아름답다. 그에게는 문학이라는 액세서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라는 휘황찬란한 액세서리가 있기 때문이다. 시를 통해서, 사람의 그 볼품 없는 몸뚱어리는 순식간에 우아함의 거푸집으로 변한다. 시 없는 삶은, 그것도 삶은 삶이겠으나, 정신의 윤기를 잃은 삶일 것이다. 이 정도면, 학교를 떠나서도 그리고 밥벌이와 상관 없이도 시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바리에떼

이 책은 일종의 버라이어티쇼다. 소설과 언어학 분야를 제외한 내 글쓰기를 횡단하며 표본을 벌여놓은 것. 정치를 중심으로 한 시론들과 문학평론들과 사적 단장들이 서로 서먹서먹해 하여 이웃해 있다. 앞선 책들 가운데 굳이 형제를 찾자면, 다섯 해 전에 낸 <서얼단상>이 이 책과 가깝다 할 수 있겠다.

발자국

역사적 역할의 크기에서 엄청난 차이가 없다면, 나는 되도록 소수자에게 눈길을 주고자 했다. 말하자면 남성보다는 여성을, 백인보다는 유색인을, 다스리는 자들보다는 저항하는 자들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 모인 글들의 질료 노릇을 한 역사 자체가 힘센자들에게 워낙 편향돼 있는 터라,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유색인, 저항자들은 말 그대로 소수를 넘어설 수 없었다.

언문세설

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오래도록 나는 그 감옥 속을 어슬렁거렸다. 행복한 산책이었다. 이 책은 그 산책의 기록이다.

엘리아의 제야

홍희담 선생님의 중단편 다섯 작품이 최근 '깃발'이라는 표제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묶여 나왔다. 예전에 한 번씩 스쳐보았던 그 소설들을 곧은 자세로 읽노라니, 내 삶의 가녀림이 다시금 무참하다. <깃발>의 독후감은 이 책의 교정지를 훑어보는 동안에도 계속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글의 그릇이 삶의 그릇보다 클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 내 글은 앞으로도 결코 대동세상을 구가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애달픈 일이지만, 어찌하랴, 내 몫이 그 만큼인 것들.

자유의 무늬

내가 칼럼니스트라면 다섯번째 칼럼니스트(Fifth Columnist), 곧 오열분자(五列分子)일 것이다. 나는 이따금 내가 세속도시에서 유토피아로 밀파된 스파이이거나 유토피아에서 세속도시로 파견된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스파이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불안하고 누추한 회색지대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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