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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최규승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3년,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

직업:시인

최근작
2023년 11월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

1. 시의 제목을 정하고, #1부터 #298까지, 순서에 관계없이, 느닷없이 불현듯,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번호 다섯 개를 떠올릴 것, 숫자에 해당하는 장면을 이어, 세상에서 하나뿐인, 시를 만들 것 2. 절창도 없이, 제목의 의미도 버리고, 평평하게, 지루하게, 밋밋하게

무중력 스웨터

미적 기준 항상 아름답거나 아름다움에 저항하거나 그 경계를 팽팽히 밀고 나가는 것이 예술이라지만 난 그러지 못합니다. 가끔 아름답다가 어쩌다 아름다움에 대들어보는 그 테두리 안에 꼬치를 튼 누에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줄줄 말이나 흘리는 것이 유일한 나의 아름다움입니다.

시간 도둑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 대서소가 꽤 많았다. 관공서가 모여 있는 도심과 학교 근처뿐만 아니라 동네에도 하나 정도는 지금의 문방구처럼 대서소가 있었다. 큰 대서소에는 젊은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서는 대개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이른 이의 일이었다. 이들은 오른팔에 토시를 끼고, 매우 진지하고 긴장된 자세로 손목을 신중히 움직여 글씨를 써 나갔다. 아직 글자도 배우지 못한 어린 내게도 그이들의 하얀 손목이 여간 멋있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대서소에 한 번도 일을 맡겨 보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했다. 서류뿐만 아니라 관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문서, 심지어는 가정 통신문의 회신도 모두 아버지의 차지였다. 그래서 종종 아버지 대신 내가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내가 쓴 것처럼 우쭐해져서 반 친구들을 자신만만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미 나는 아버지의 필체를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버지의 사인까지 그대로 따라할 수 있어서 아버지는 더 이상 가정 통신문의 회신을 작성할 수 없었다. 도장보다는 사인을 선호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성적이 떨어져도 걱정이 없었다. 성적표의 학부모 확인란은 이때부터 내 차지였다. 자신을 얻은 나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대필해 주고 있었다. 어느새 내 글씨는 은밀한 편지를 벗어나 벽을 장식하게 외었다. 손이 붓고 어깨가 아파도 대서의 날은 계속되었다. 대자보판 앞에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 때는 아픈 어깨도 금세 낫는 듯했다. 가끔 공연 포스터에 쓰일 글씨를 부탁받을 때는 반듯함을 넘어서 한껏 멋을 부려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애써 써 붙인 대자보가 비에 젖거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훼손됐을 때보다 더 의기소침해졌을 때는 사람들이 외면할 때였다. 그때의 가슴 아픔이란…. 다시 작은 글씨로 은밀한 글씨를 써 내려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김수영, 이성복, 김혜순, 오규원 등의 시를 옮겨 적으며 온전히 나만을 위한 필사를 해 나갔다. 이미 세상에서 대서소가 사라지고 컴퓨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시(詩)도 자판으로 ‘치는’ 시대가 왔으므로 ‘대서의 시절’은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손으로 몸으로 익히는 시가 머리로 익히는 시보다 훨씬 강렬했으므로 나는 필사를 멈추지 않았다. 시인들의 시를 적은 대여섯 권의 다이어리를 그녀에게 선물하고 나는 시인(詩人)이 되었다. 이제 다시 내 시를 옮겨 적는다. 필경사의 마음으로 대서소의 그이들처럼, 그리고 아버지처럼…. 내 시이지만 내 것이 아닌 시(詩). 그런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시는 ‘시(詩) 쓰기’라는 형식으로 ‘시(詩) 하기’의 내용을 채워 나간다. 아무리 자판을 두드려도 시는 쓰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시인(詩人)이다.

처럼처럼

시는 시다 짜지 않아야 달지 않아야 쓰지 않아야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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