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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번역

이름:정보라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6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4년 3월 <아무튼,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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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고기』는 절박함과 작품 자체의 강렬함이라는 측면에서 이제까지 읽어본 소설 중 최고에 속한다. 대체 끝이 어떻게 될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면서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무서워서 끝을 미리 볼 수가 없었다. 결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자비했다.

그녀를 만나다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 2020년은 혼란스러운 해였다. 누구에게나 그랬을 것이다. 나는 2020년에 오체투지를 열심히 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두 번 오체투지를 했고,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온종일 오체투지를 했다.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고 사람이 죽었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은 엉망이 되었고 또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오체투지를 할 때는 그런대로 즐거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차별금지법 제정 오체투지는 국회 주변을 오체투지로 한 바퀴 돌았다.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될 때까지 근성으로 계속 돌아야 되는 줄 알고 긴장하고 갔는데, 그건 아니고 한 바퀴만 돈다고 하셔서 약간 실망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될 때까지 오체투지를 해야 했다면 나는 이 책의 교정고도 못 보고 작가의 말도 못 쓰고 지금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차별금지법 제정 오체투지는 두 번 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주최하셨는데 스님들은 엎드렸다가 일어나시는 속도가 정말 빨랐다. 소림사 스님들이 왜 어째서 어떻게 해서 날아다니는지 온몸으로 이해할 것 같았다. 맨 뒤에서 오체투지를 하시던 분이 속도 너무 빠르다고 좀 천천히 가달라고 하소연하셔서 속도가 좀 줄기는 했다. 그리고 앞에서 목탁으로 신호하시던 스님께서 내내 목탁을 기운차게 두드리다가 중간에 목탁 채를 부러뜨리셨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오체투지는 길고 힘들었다. 산업재해 피해자 김용균 님 어머님이자 김용균재단 이사장이신 김미숙 선생님과 이한빛 PD님 아버님께서 국회 본청 앞에서 한겨울에 단식을 하고 계셨고 오체투지는 4박 5일간 이어졌다. 김용균 님은 2018년 12월 24세의 젊은 나이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이한빛 PD님은 방송현장 과로와 비정규직 스태프 해고문제 등 열악한 업무환경에서 괴로워하다 2017년 4월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내 자식처럼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단식투쟁에 나섰다. 항상 부모님들이 자식을 애도할 새도 없이 투쟁에 나선다. 자식 잃은 부모님들 단식하는 모습 좀 진짜 그만 봤으면 좋겠다. 하여간 그래서 나는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오체투지 4박 5일 중에서 고작 하루 나갔는데 어째서인지 출발지점에 나가봤더니 나만 여자고 나머지 분들 다 남자분들이셔서 왠지 쓸데없는 오기가 나서 사회자님이 힘들면 오전에만 하고 가셔도 된다고 귀띔해주셨지만 아침에 구의역 앞에서 출발해서 저녁에 전태일 다리까지 일정을 다 버텼다. 점심시간 빼고 7시간 동안 이어진 장렬한 팔굽혀펴기였다(오체투지는 사실 의례화된 팔굽혀펴기다). 12월이라서 땅바닥은 차가웠고 나는 계속 엎드렸다 일어났다 해서 덥고 땀이 났고 쉬는 시간에는 추웠고 마스크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안에 물방울이 맺혀서 엎드려 있으면 코와 입으로 응결된 내 땀방울이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가던 중에 어쩌다 보니까 왕복 4차선 차로로 이어지는 주차장 출구 앞에 엎드려 있었는데 주차장에서 차가 나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차주와 경찰과 오체투지 응원단(?)이 모두 몰려들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하필 주차장에서 나오겠다고 슬금슬금 전진하는 그 차 앞에 내가 엎드려 있었다. 주최 측인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행동’ 분들하고 경찰관들하고 다들 달려와서 차 앞을 몸으로 막아주셨는데 그 사실은 나중에야 깨닫고 마음으로 깊이 감사했으나 그때는 정말 너무 무서웠는데 그렇다고 오체투지의 대의와 데모꾼의 체면을 버리고 일어나서 도망갈 수도 없고 해서 아스팔트에 고개를 처박고 죽은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고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은 갈수록 엉망이 됐고 변희수 하사님이 돌아가셨고 평택항에서 산업재해로 스물세 살 이선호 님이 돌아가셨고 이선호 님 아버님과 누님과 고등학교 동창들이 또 투쟁에 나섰다. 정말이지 너무 엿 같아서 오체투지 또 하고야 말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아작 출판사 편집장님이 연락하셔서 <영생불사연구소>와 분위기가 잘 맞을 법한 단편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셔서 내가 그냥 하나 새로 쓰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사실 이 모든 상황의 와중에 <영생불사연구소> 같은 좌충우돌 코미디는 도저히 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와중에 나는 류드밀라 페트루쉡스카야(Людмила Петрушевская)라는 러시아 여성 작가의 단편선을 읽게 되었다. 페트루쉡스카야는 1938년에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여 소련 시절부터 지금까지 작품활동을 하시는 역전의 용사이며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과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페트루쉡스카야의 유명한 작품 중에 잡지사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동시를 읽어주는 공연도 하면서 어떻게든 손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중노년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투지 넘치는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렇게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문체로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대표님은 <그녀를 만나다>를 마음에 들어 해주셨다. 독자님들도 마음에 들어 해주시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괜히 나대서 당사자분들께 민폐를 끼치는 건가 걱정되기도 한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버티는 것밖에 안 남은 듯하다. 팬데믹이 물러갈 때까지, 어떻게든 다시 숨통이 트일 때까지, 차별과 폭력과 산업재해와 죽음과 상실을 견디면서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 <Maria, Gratia Plena>는 2018년쯤에 읽은 신문기사 때문에 쓴 이야기이다. 프랑스 남부의 한 기차역에서 남성 경찰관이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를 근무용 권총으로 쏘아 살해한 뒤에 자기도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는 사회적으로 가정폭력에 관대하지 않으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조치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들었다. 해당 경찰관의 아내는 가정폭력에 오래 시달렸으나 남편이 경찰관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나라나 이 지경이다. 아내가 마침내 아이들을 데리고 생존을 위해 탈출하려 했다. 그래서 남편이 총을 들고 뒤쫓아와 전부 죽였다. 그게 개명한 21세기하고도 18년이 더 지난 2018년이었다. 2020년 팬데믹이 세계를 덮쳤고 사람들은 집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더 많은 여자들이 남편에게 얻어맞고 더 많은 아이들이 부모 손에 죽어간다. 내가 데모를 하고(요즘에는 모여도 한 자리에 머물러서 집회를 하지 못한다. 이동해야 한다. 마스크 쓰고 아홉 명씩 조를 나눠서 행진은 할 수 있다) 오체투지를 하고 온라인 서명을 하고 국회 앞에 드러눕고 청와대 앞에 드러눕는다고 세상이 당장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계속 소리 없이 얻어맞고 누군가는 계속 소리 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누군가 앞에서 나는 최소한 부끄럽지 않고 싶다. 데모도 했고 행진도 했고 (마스크는 썼지만) 소리도 질렀고 서명도 했고 길거리에서 팔굽혀펴기도 했고 전진하려는 SUV 차량 앞에 엎드려서 버티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내가 떳떳할 것 같다. 그리고 일단은 뭐라도 해야 좀 덜 열 받는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정신건강과 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해서 데모를 하고 있다. 글도 써야 되는데, 주로 데모를 하고 있다. *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1929)에서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그냥 논쟁일 뿐이며 유토피아는 세상에 진짜로 변화를 가져오는 움직임이라고 설명하고 유토피아를 네 가지로 구분했다. 그중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20세기에 이미 다 망했으니까 넘어가고, 보수주의적 유토피아적 태도는 유토피아가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으니 우리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으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으면 과거에 이루어진 예시를 따르면 된다고 주장한다. 천년왕국적 유토피아적 태도는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라서 좀 어려워 보이지만 내용인즉 당장 유토피아가 이루어져야 하고 안 이뤄지면 혁명! 때려 부순다! 이런 방향성이다(개인적으로 몹시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자유주의적 유토피아적 태도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상사회가 내 눈앞에 나타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더 좋은 세상이 반드시 올 테니까 꾸준히 그때까지 노력한다는 태도라고 한다. 나는 실제로 이런 태도를 견지하며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더 좋은 세상을 어떻게든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근데 세상에는 망할 놈들도 그만큼 많다. 가끔은 정말 지친다. * 스페인의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y Jugo, 1864~1936)는 역작 《인생의 비극적 의미》(1912)에서 상실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커다란 특성이며 그러므로 상실을 겪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은 그 상실된 것을 대체하거나 복구하기 위해 빨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멈추어서 애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러시아의 소설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Андрей Платонов, 1899~1951)도 상실과 트라우마만이 모든 인간의 삶에 공통적인 요소이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상실에 대한 애도와 트라우마의 경험으로 연결된다고 했다. 이렇게 딱 나서서 말한 건 아닌데 플라토노프 작품을 여럿 읽어보면 대충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상실하면 애도해야 하고,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물론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광화문에 농성장이 있고 거기서 세월호 서명을 받던 시절만 해도 나는 304분의 이름을 진짜 절대 평생 못 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단원고 피해자분들이 몇 반이었는지 헛갈린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이렇게 연약한 것이다. 게다가 매일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서 덮어쓰기를 하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내가 몸과 마음으로 애도했고 애도하며, 더 나은 사회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 나와 당신의 생존을 위해서 거리로 나아가 행동하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피해자와 그 가족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나와 당신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아주 조금씩이라도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생존하고 기억하고 애도하며. - 2021년 여름, 정보라

당신이 가장 위험한 곳, 집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거권은 기본권이다. 주거가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 공포가 빨리 끝나고, ‘집 호러’는 그냥 소설이나 영화 속에나 존재했으면 좋겠다.

로봇 동화

《로봇 동화》는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문학 출판사(Wydawnictwo literackie)에서 출간된 2017년판 《Bajki robotow》를 원전으로 사용했다. 원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유희로 가득하다. 렘은 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학 용어가 라틴어로 되어 있으므로 라틴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어뿐 아니라 때로는 라틴어나 다른 외국어를 사용해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기계 이름으로 말장난을 하고 여기에 화학과 물리학 지식을 섞어 넣는다. 번역하는 입장에서 원작은 더없이 즐겁고 번역 작업 또한 재미있었는데 수많은 언어유희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길 수 없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 (중략) 렘이 이 작품을 재미있게 쓴 만큼, 독자분들도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로봇 동화》 전체를 통해 렘은 인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상은 즐거운 일이며, 과학도 기계도 신화도 동화도 무엇이든 상상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인간이 상상한 머릿속의 우주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문이 열렸다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맞수’를 만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불특정 다수의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정상적인 ‘남들’이라면 결코 이해해 줄 수 없을 사연을 혼자 끌어안고, 혼자서 고민하면서, 그래도 어떻게든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사람 둘이 어느 날 그토록 조심하던 바로 그 상황 안에서 마주치는 이야기. 그리고 그 뒤로 이야기가 더 이어지다 보니까 맞수는 ‘짝’이 되었다. 누구나 알고 보면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구석이 하나둘씩은 있고, 개중에는 정말로 특이한 사람도 가끔 있다. 그러나 보통은 어떻게든 자기 앞가림을 하면서 대체로 평범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간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알아 가다 보면 또 그 사람도 나 못지않게 특이한 구석이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사실은 평범하지 않지만 또 언뜻 보면 평범한 보통 사람들 중에서, 짝이 딱 맞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가 짝임을 알아보는 과정을 풀어 나가고 싶었다. 언제나 지나다녀야만 하는 골목길의 가로등 아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서 있다는, 이런 상황은 현실이라면 정말 싫겠지만 상상 속에서는 흥미로운 이미지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고장이 잘 나서 아무리 고쳐도 소용이 없는 가로등이나 조명등은 어느 동네에나, 혹은 어느 건물에나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밤이 오면 우리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여성 작가의 작품 속에 묘사된 ‘미친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작가 자신의 불안과 분노를 표상하며, 이러한 분노와 광기는 작가와 등장인물뿐 아니라 독자도 느낄 수 있도록 묘사된다고 설명한다. 나는 “화장실의 미친 여자”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여러 단계를 건너뛰어 『밤이 오면 우리는』으로 발전시켰다. (……) “화장실의 미친 여자”에는 나의 불안과 분노가 많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또 나는 사회적 참사나 부당한 죽음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 나는 그 사람들이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저런 기괴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지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그리고 기후위기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운데, 소설을 쓰려고 자료 조사를 하다가 실제로 이웃 국가에서 인공태양을 만드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논문을 읽고 나는 더욱 놀랐다. (……) 국가 주도로 그런 실험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수소폭탄을 갖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국제사회에서 욕먹기 때문일까? 그런 모든 분노와 두려움과 혼란이 모여서 『밤이 오면 우리는』이 만들어졌다. 혼란한 세상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싶을 때, 악하고 비겁한 사람의 목을 물어뜯고 싶을 때, 독자님들께 대리만족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칼

나선정벌(羅禪征伐)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조선-청나라 연합군과 러시아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다. 원인은 영토분쟁이었는데, 신생국가였던 청나라는 쇠락해가는 명나라를 견제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과 이에 따른 경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1580년대부터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당시 서유럽에서 비싸게 거래되던 동물 털가죽을 수급하려 했다. 이 두 제국은 1650년대 초부터 충돌하기 시작했고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속국이 된 조선에 지원을 요구했다. 조선은 청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북쪽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총포수를 파견했다.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모두 승리했고, 1658년 제2차 나선정벌에서 러시아 측 지휘관인 오누프리 스테파노프(Онуфрий Степанов)가 사망하여 조선-청나라 연합군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2차 나선정벌에 참여했던 함경북도 첨사 신유(申瀏)가 남긴 일기 《북정록(北征錄)》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조선군은 러시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그저 북쪽에 사는 도적 떼 정도로 여기고 출정했다. 그런데 막상 러시아군을 마주하자 신유는 상대가 도적 떼가 아니고 제대로 편제를 갖춘 강력한 군대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신유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다고 적을 얕보지도 않고, 싸워볼 만한 상대라 존중하는 군인다운 태도를 보인다. 전투는 현재 중국의 흑룡강 인근에서 이루어졌는데, 1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군을 기습하여 하루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2차 나선정벌에서 청나라 군대는 러시아 함대가 호위하고 있던 상선에 실린 물품을 탐내어 조선 총포수들에게 전투 중에 총을 쏘지 못하게 한다. 이 때문에 전사자가 없었던 1차 나선정벌과 달리 2차 나선정벌에서는 8명의 전사자와 2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신유는 피해자들의 이름과 고향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 청나라군은 신유에게 전사자의 시신을 태워버리라고 하는데, 신유는 조선의 관습대로 전사한 부하들을 정중히 매장해준다. 신유에게는 2차 나선정벌 전투가 승리로 끝난 이후에 더 큰 고난이 찾아왔다. 청나라는 1차 나선정벌 이후 조선군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러시아군 기지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2차 나선정벌이 끝나자 청나라에서는 그 기세를 몰아 조선군 지원병들과 함께 러시아군의 시베리아 기지로 진격하고 싶어 했다. 반면 신유는 전승을 거두고 임무를 완수했으니 부하들을 더 고생시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신유는 일주일에 걸쳐 청나라의 진격 요구를 거절하고 청군을 설득한 끝에, 겨우 러시아군이 사용하던 조총 한 자루를 전리품으로 얻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신유가 받아온 이 러시아군의 조총은 러시아와 조선이 1860년 정식으로 수교를 맺기 200년 전에 러시아와 조선이 이미 공식적으로 역사에 남은 접촉을 가졌다는 중요한 증거품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조총이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나선정벌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영웅 서사의 요소들을 모두 갖춘 완벽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차 나선정벌을 이끌었던 변급(邊?)과 2차 나선정벌을 이끌었던 신유는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사고방식도 전투방식도 전부 다른 러시아의 군대를 처음 마주쳤을 때 외계인을 마주친 기분이 아니었을까? 나는 특히 신유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함께 싸우다 이국땅에서 스러진 동료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국의 관습대로 매장한 사실이나, 전사자들의 이름과 고향을 하나하나 일기에 기록하며 비통해한 것, 부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청나라에 잘 보여 입신양명하겠다는 허영심 없이 그저 할 일을 해내고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 한 것, 그리고 군인으로서 무기에 관심을 보여 비싼 털가죽도 금은보화도 아닌 러시아군의 총을 갖고 싶어 했던 것 등등, 훌륭한 군인이었던 것 같고,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선정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제국”의 모델은 스타워즈가 아니고 나선정벌의 원인 제공자인 청 제국(1618~1924)이다. 그런데 나선정벌을 우주로 옮겨놓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쓰다 보니까, 쓰면 쓸수록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갔다. 그러나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것이므로 딱히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썼다. 어쨌든 전쟁의 이야기, 싸우는 이야기라는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쓰다 보니까 이야기는 내가 아는 종류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갔다. 어떤 투쟁이든 그 싸움 전체는 나라는 한 개인보다 훨씬 크게 마련이고, 나는 그 안에서 내가 겪은 일들밖에 알지 못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세월호 1주기를 많이 생각했다. 광화문 현판 아래 세월호 부모님들과 나의 동지들과 차벽으로 막힌 채 앉아 있던 것, 차벽 위로 물대포가 솟아오르고 차벽 사이로는 우리 편의 끝없는 깃발들이 보였던 것을 생각했다.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경찰이 줄지어 다가올 때 옆에 함께 앉아 있던 세월호 어머님하고 손을 꼭 잡았던 것을 생각했다. 민중총궐기를 생각했다. 고공농성 하시는 분들을 만나러 전광판 아래로 굴뚝 아래로 행진하던 것을 생각했다. 탄핵 가결안이 통과되었을 때 국회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겼다! 이겼다!”고 외치던 목소리와 하늘을 향해 치켜든 수많은 주먹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개인은 정말로 작고, 그 개인이 던져진 세상은 크고 넓고 그 안에는 수많은 불의와 수많은 싸움들이 있었다. 그 싸움은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는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 안에서 나와 같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고, 나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렇게 누군가를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멋있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총싸움도 하고 칼싸움도 했는데 그리하여 SF를 가장한 무협지가 되었다. 쓰면서 재미있었으니까 후회는 없다. 나선정벌은 이후 어떻게 되었느냐면, 1700년대 조선에서 히트친 판타지 소설이 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을 겪고, 병자호란(1636~1637)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왕자 중 한 명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수모를 줄줄이 겪은 끝에 나선정벌이라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조선을 그토록 짓밟고 속국으로 만든 청나라조차 이기지 못했던 강력한 미지의 외적을 변방의 이름 없는 총포수들이 물리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열패감에 젖어 있던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어 1700년 초부터 두세 번쯤 소설화되었다. 그러다가 신유의 후손이 직접 나서서 신유가 남긴 《북정록》과 이전에 출간된 한글판 소설을 엮어서 전쟁판타지 액션 로망으로 다시 쓰게 된다. 나선정벌이 소설로 거듭나면서 허구의 전투는 규모가 점점 커지고 실제로는 없었던 이국적인 동물들과 아름다운 러시아 여자들이 난데없이 등장하는 가운데 신유를 모델로 한 주인공은 장대한 전투에서 엄청난 패배를 거듭하던 청나라를 바람같이 나타나서 구원해주는 천하의 ‘수퍼솔저’로 묘사된다. 내가 아는 싸움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난세와 영웅의 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명제들이 존재하지만, 가만 보면 어느 시대나 모두 난세인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난세에서 내가 아는 영웅은 수천의 대군을 호령하는 장수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뛰어들어 옆 사람의 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그냥 보통의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 분들이 현실에서 승리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간절히.

서로의 계절에 잠시

삶의 경험은 어쨌든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플라토노프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살아온 시간을 몸 안에 간직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방식은 사람마다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다양성은 인류라는 생 물종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야기의 효용 자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세계를 상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삶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든, 결국 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상과 허구와 상상이라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같다.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인데 그러면 현실에서 더 멀리 날아갈수록 더 재미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에서 더 멀리 떨어질수록 이야기는 (그리고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독자님들은)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혼란도 재미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독자님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 독자님들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안드로메다 성운

공산주의는 몰락했고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미래는 밝고 찬란하기보다는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더 넓은 세계로 향하는 꿈은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영미권과는 조금 다른 사고방식과 인간관을 보여주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서도 예프레모프가 꿈꾸었던 것처럼 다른 세계와의 찬란한 조우를 경험해보시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왕

치열한 여자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들 《여자들의 왕》은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틀에 박힌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작품들을 모은 책이다. 책을 여는 작품으로 수록된 일명 “공주, 기사, 용” 3부작은 “공주, 기사, 용”이라는 단어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서양 판타지의 초점을 공주와 용으로 바꾸었다. 원래는 그냥 단순하게, 칼 들고 건들건들하며 “죽을래?” 같은 말을 내뱉는 공주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까 왕비와 기사와 왕자도 각자 다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썼더니 3부작이 되었다. 서양 영웅담에 나오는 악한 용의 기원은 고대 인도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인도에는 커다란 뱀 혹은 도마뱀이 신화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그래서 러시아어나 폴란드어에서 “용”이라는 단어는 (커다랗고 신화적인) “뱀”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다 인도에서 원시불교가 발생하면서 당시 불교와 경쟁했던 조로아스터교에 용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불을 뿜는 악한 용’이라는 형상이 생겨났다. 원시불교의 여러 설화에 따르면 이 불을 뿜는 악한 용이 석가모니의 말씀을 받아들여 불교에 귀의하면 불법을 지키고 석가모니를 보호하는 선한 호법용(護法龍)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양 영웅담에서는 용이 종교에 귀의하는 부분이 빠지고 용감한 기사가 불을 뿜는 이교도의 악한 용을 물리치는 부분만 남아 있다. 용이 저지르는 나쁜 짓 목록에는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공주를 납치하는 상황이 반드시 포함되고, 특히 서유럽 영웅담에서는 그래서 용감하고 기독교를 수호하는 선한 기사가 연약한 공주를 용에게서 구출한다. 용도 사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사연이 있고, 공주도 사람이니까 평생 마냥 저렇게 연약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좀 뒤집어보고 싶었다. 〈사막의 빛〉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한 뒤에 쓴 이야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와 문화의 충돌은 여러 가지 갈등을 낳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무조건 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로 매도되고 있다. 내가 가서 직접 본 중앙아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공부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바,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실크로드의 후예들답게 특유의 융통성 있고 조금은 유머감각 있는 사고방식과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건강하고도 풍성한 상인문화를 일으킨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주인공이 신비로운 여행을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내가 한국인이니까 고려의 용도 하나쯤 넣어주고 싶었다. 위에서 말한 서양의 불 뿜는 용과 반대로 동양의 용은 물을 다스리는데 이런 정반대의 특징은 중국을 통해 불교가 한국과 일본에 전해지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민족이라 날씨, 특히 비가 얼마나 오느냐가 국가 경제에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고 그러므로 농민들은 비를 지배하는 토착신을 이전부터 믿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지면서 이 비를 지배하는 신에 선한 호법용의 형상이 합쳐져서 물을 지배하는 용신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용 얘기는 다 재미있는데 동서양의 정반대되는 형상 부분이 특히 재미있다. 표제작 〈여자들의 왕〉은 아주 농염하고 화끈한 여자들의 관능적 권력투쟁을 써보고 싶어서 시도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아서 만족한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 이야기는 사실 나는 잘 모르는데 옛날에 트위터에서 누군가 언급했던 걸 본 적이 있다. 사울, 요나단, 다윗 전부 남자들이라서,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전부 여자로 바꾸기로 했다. 이야기를 쓰다 보니까 요나단과 다윗보다는 살로메와 세례자 요한에 더 가까운 줄거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화자인 “나”만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다 쓰고 보니까 “누이”가 대단히 위험하고 음험하고 그러면서도 예쁘고 그래서 더 위험한, 일종의 ‘여자 낚는 팜므파탈’로 묘사되어 만족스럽다. 〈어두운 입맞춤〉은 흡혈귀 이야기인데,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내 멋대로 적당히 섞어서 만들었다. 〈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 삼룡이는 남성, 삼룡이가 사랑하는 안방마님은 여성, 《드라큘라》에서도 흡혈귀는 남성이고 흡혈귀의 사랑의 대상은 여성인데 이런 구도를 뒤집고 싶었다. 그런데 〈벙어리 삼룡이〉의 구도 속에서 삼룡이는 신분과 외모로 인해 권력이 없는 취약한 인물이고 안방마님은 가부장제 하에서 남편에게 학대당해도 저항할 수 없는 성별권력적으로 취약한 인물이라서 이 두 인물의 취약성을 바꾸거나 없애서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구도는 그대로 두고 여성주인공을 인간이 아니도록 바꾸어서 권력을 주었다. 여성이 귀신이나 괴물이 되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수록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대학원에서 배운 동슬라브 원초연대기와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보고 들은 집안의 역사를 바탕으로 썼다. 동슬라브 원초연대기에는 유일한 여성 군사령관 올가 공주가 등장한다. 남편 이고리 왕자가 외적에게 살해당하고 올가 공주 본인은 어린 아들과 둘만 남은 상태에서 적군의 지배자에게 강제로 시집갈 위험에 처한다. 그러자 올가 공주는 여러 가지 꾀를 써서 적들의 군대를 생매장하기도 하고 태워죽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적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서 완전히 섬멸시킨다. 그러나 올가 공주가 유일하고도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 군사 지휘관이며 이후 동슬라브 중세 역사에 이런 진취적인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게 슬퍼서 내 상상 속에서라도 올가 공주의 대를 이어주고 싶었다. 이 책은 나오기도 전부터 “남자 죽이는 여자들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는데,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상상의 중심을 여성으로 옮기면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어진다. 독자 여러분께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면 좋겠다. - 2022년 여름, 정보라

죽은 자의 꿈

세상에는 잊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일에 관심이 없지만 관심 가질 일에는 관심을 갖고 화낼 일에는 오래 분노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다. 타인을 괴롭히고 폭행하고 위협하고 성적으로 학대하면서 삶의 즐거움과 쾌락을 찾는 인간들은 하루빨리 땅에 파묻혀 동물과 곤충의 먹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식물의 비료가 되기를 기원한다. 산 채로 묻혀서 산 채로 먹히면 더 좋겠다. 이런 어둡고 괴로운 이야기와 분노에 가득 찬 작가후기를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린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기괴하고 비일상적이다. 나는 기괴하고 비일상적이며 때로 부자연스러운 상황과 줄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똑같이 기괴하고 비일상적이며 종종 부자연스러운 언어를 사용한다. 나는 매끄럽고 예쁜 문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들이 매끄럽지도 예쁘지도 않기 때문이며, 내가 보는 세상이 전혀 매끄럽거나 예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독자님들의 세상이 너무 지나치게 기괴하고 너무 오랫동안 낯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평온하고 차분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께는 그냥 잠시 이상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경험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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