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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동옥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7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고흥 (사수자리)

직업:시인

최근작
2023년 12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2016 제16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오래 멀리 가겠다. 오늘의 우연을 필연으로 바꿀 수 있도록 시를 살겠다. 그리고 이 우연에 얹힌 인정과 기대를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

고래가 되는 꿈

누군가, 이 빠진 손톱 한 쌈을 묻어두고 영영 다른 땅으로 떠났다는 사연 시간이 흘러, 그대라는 말은 내가 여기 돌아와 처음 씻어 헹군 꿈이었고 나라는 말은 그대 입술이 처음 삼킨 비밀일 테니 익숙한 농담과 소문들 갈피로 끝없이 웃자랄 삶의 모종들 푸릇푸릇 싹트는 귓바퀴, 이파리 반질반질 굴곡진 푸르름 속에 다시 쓰일 끝없는 이야기. 인간은 꿈꾼다. 고로, 인간은 변한다. 2016년 가을, 南陽에서 吉音까지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시인이라는 이름을 ‘나’라는 인간의 고유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은 시가 비롯되는 장소를 ‘몸’으로 돌리기까지 걸린 시간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시를 쓰고, 동시에 감각과 사유의 동근원적인 움직임 속에서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분명히 실재한다. 그동안 나는 시를 써 오며 ‘시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섣불리 답을 내리려 한 적 없고, 심지어는 시를 정의하고 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려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가 위안을 준다면 누구에게 어떤 경로를 거쳐 다가서는지? 답을 찾으려는 노력과 시를 살려는 노력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써 온 시와 내가 해석한 나의 결절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읽히고 발각되고 해석되는 무언가에 대해 따로 말을 보태는 것은 내가 써 온 시를 다시 나에게로 귀속시키는 ‘허무주의’ 내지는 ‘냉소주의’의 발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쳐 든 당신에 대해 상상해 본다. 당신은 아마도 나와 비슷한 정도로 논변을 풀어헤칠 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을 테고,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마주하면서 정서적인 움직임을 살아 낼 테고, 나와 같은 방식으로 범주와 체계를 넘나들며 세계를 인식할 테고, 그 가운데서 자신만의 취향을 때로는 머뭇거리며 때로는 과감하게 드러내는 미감(美感)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경험과 가능성의 알고리즘으로 세계를 해석하지 않는 당신은 때로는 직관에 의지하여 때로는 운과 우연과 욕망에 의지하여 세계를 해석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가진 지적?정서적?인식적?미적 척도에 기대어 시를 써 왔다. 그러므로 내가 시를 쓰는 일은 당신의 지성과 정서와 인식과 미학과 직관을 받들어서 문장을 이어 가는 작업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어떤 멋진 아포리즘도 없고, 신비도 없다. 우연으로 시작된 마주침과 이해 그리고 계속되는 해석의 공방전이다. 이 책은 객관적인 실체인 ‘시’와 ‘당신’을 탐문하기 위해 써 내려간 헛말 뭉치다. 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은 “우리가 시를 쓰고 과학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해서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별개의 세계에 속한 것이고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하나의 세계 일부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신비화이다”라고 말했다. 정의할 수 없으므로, 논리를 동원해서 변증하기 곤란한 것들일랑 우리가 살아 내는 마음과 몸의 세계 바깥의 어딘가에 괄호 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손쉬운 해결책일 수도 있다. 시는 인간의 ‘몸-마음’의 연결 고리 안팎 어딘가에 신비한 방식으로 ‘실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화된 통념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사유를 중단시키려는 일종의 사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사유를 포기한 대가로 얻은 대답이기 때문이다. 설은 ‘인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필요조건으로 여덟 가지를 든다. 의식, 지향성, 언어, 합리성, 자유의지, 사회 및 제도, 정치, 윤리가 그것이다. 나는 시를 정의할 용기도 없고, 지혜도 없다. 대신 설이 말한 저 여덟 가지 조건들에 관해 시로 품은 물음들을 풀어낸 소박한 궁금증으로 내 방식의 ‘오답’에 다가서고자 했다. 이 책의 주제는 시인이라는 인간의 필요조건에 관한 탐구인 셈이다. 그간 쓴 글들 가운데 골라서 책을 묶었다. 주제마다 문체를 달리하려고 애썼다. 월평과 계간평, 서평과 시집평, 발문과 해설 들은 모두 뺐다. 자연스럽게 소위 현장 비평이나 실제비평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글들은 빠졌다. 시인이라는 고유명과 비평은 어쩌면 이중 구속(double bind)을 강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장에 가담하면서 때때로 내가 텍스트에 더하는 평점(評點)과 내 시에 빠진 지배소를 구분하는 것은 시작 행위에 백해무익한 일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성실하게 실제비평에 임하는 비평가들의 문장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도 그런 종류의 글은 빼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여기 간추린 글들은, 마지막 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면을 통해 청탁을 받고 쓴 것들이다. 마감을 어겼고, 분량을 넘겼으며, 편집자와 기획자를 애태우기 일쑤였다. 주제를 받을 때마다 내가 글을 쓸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는가를 생각하고 청탁을 수락했다. 글을 쓸 때마다 우선은 일기와 시작 노트와 시를 다시 읽었다. 사유와 정념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태어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받아 적은 질문들이 빼곡한 문장들을 돌보는 데서 글을 시작한 셈이다. 문장은 어느 순간 단상이 되었다. 짧은 글줄들을 선별하고 다시 조립해서 한 편 한 편 완성해 나갔다. 그러니 여기 실린 글들 속에는 내가 쓴 시와 습작 노트와 일기가 고갱이를 이루어 고스란히 스며들었을 테다. 원고를 확정한 다음 책을 4부로 나누었다. 1부와 4부에서는 ‘나’라는 ‘서정적 주인공’의 존재 가능성에 관해 물었다. 1부와 4부만을 읽으면 고백에서 시작해서 시론으로 끝나는 구도다. 어쩌면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은 마지막 꼭지에 실은 나대로의 ‘시론’ 하나를 쓰기 위한 문장 연습에 불과할 수도 있다. 2부는 내가 쓰는 ‘시’라고 불리는 것들이 한국어 밖의 제3세계 언어권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한국어 안에서는 어떤 모양으로 있었고 있는지를 훑어본 글들이다. 시인과 시단과 영향사와 실재와 환상의 토대 따위의 물음들이 2부에 쓴 글들의 주제인 셈이다. 3부에 실린 글들은 나를 문학으로 이끌어서 내 삶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헌사다. 애초에는 3부에 실릴 글만으로 한 권의 책을 쓰려고 했다. 그 가운데 김정환, 박용하, 박정대, 함기석, 강정, 안현미 시인과 나를 가르친 이승훈, 유성호 두 분 선생님 그리고 나와 ‘이름만 비슷한’ 신동문에 대한 글을 골랐다. 여기에서 빠진 이들은 이성복, 송찬호 시인 그리고 소설가 서정인, 최인석 그리고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enst Bloch) 그리고 소설가 다닐로 키슈(Danilo Ki?)다. 이들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떴고, 시인이 되었고, 이들을 떠나려 발버둥 쳤고, 이 책까지 쓰게 된 것이다.

밤이 계속될 거야

시 한 줄 쓰고 고개 돌려 보면 세상이 달리 보였다. 달라져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이야기가 또 나의 이야기가, 모두 함께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삶이 계속될 거야.

서정적 게으름

약자의 아름다움에 친절하고, 거울을 향해 환대를 베풀며 살고 싶다. 별들이 느릿느릿 마지못해 자전을 끝마치고 죽어 가는 새벽빛 속에 눈을 감고 싶다. 그리하여 내내 끝까지 사유했다는 느낌 속에서, 끝까지 느꼈다는 사유 속에서 살고 또 쓸 것이다.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초판 시인의 말 아침에는 인두겁을 벗어 벽장에 걸었다. 간신히 일인칭이 되어 거리로 나섰다. 바람처럼 샛길로만 다녔다. 걸음을 멈추면 외계의 종점으로 몸이 먼저 옮아갔다. 무수한 낱낱의 표정들, 일사불란한, 상처도 구체적으로, 아픔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무언가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낮에는 허무하려 애썼다. 혼자였고, 혼자이기 위한 싸움은 계속된다. 우주가 주검이 되어 식탁에 놓인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테다. 방문을 열면 시린 무릎이 먼저 들어가 앉는다. 밤이면 냉정하려 애썼다. 부드럽게 부푸는 흰 종이의 척후병, 한꺼풀씩 몸에 들씌운 인두겁을 벗어 재웠다. 그것은 번번이 비정한 울음이었다. 여기 한 권의 시집이 당신 앞에 놓였다. 행간에서 심장까지 가닿는 간극을 손톱으로 헤아리며, 책갈피를 넘기는 당신의 손가락도 있다. 나는 단 1초 동안 기쁘고, 다시 홀로 있으라. 마침내 당신은 내 지음(知音)이 되라. 2008년 2월 신동옥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개정판 시인의 말 54편을 엮어 만든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 2008)를 그대로 되살리려 노력했다. 다만, 지금의 눈으로 살피려 해도, 그때의 마음으로 품으려 해도 쉬이 보아 넘기기 힘든 5편은 버렸다. 나머지 49편을 초판의 구성과 순서 그대로 실었다. 우려했던 대로 ‘악공’은 내 페르소나가 되었다. 한동안은 부러 악공을 등지고 썼다. 악공은 힘이 셌다. 악공과 드잡이하며 일인칭을 단수에서 복수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나서야 적과 사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요행으로 지음을 얻었으되, ‘홀로 있으라’는 그제의 다짐은 이제의 생활이 된 듯도 하다. 여기 한 권의 시집이 다시 당신 앞에 놓였다. 행간에서 심장까지 가닿는 간극을 손톱으로 헤아리며 책갈피를 넘기는 당신의 손가락도 있다. 2021년 7월 신동옥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아침에는 인두겁을 벗어 벽장에 걸었다. 간신히 1인칭이 되어 거리로 나섰다. 바람처럼 샛길로만 다녔다. 걸음을 멈추면 외계의 종점으로 몸이 먼저 옮아갔다. 무수한 낱낱의 표정들, 일사불란한, 상처도 구체적으로, 아픔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무언가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낮에는 허무하려 애썼다. 혼자였고, 혼자이며, 혼자이기 위한 싸움은 계속된다. 우주(宇宙)가 주검이 되어 식탁에 놓인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테다. 방문을 열면 시린 무릎이 먼저 들어가 앉는다. 밤이면 냉정하려 애썼다. 부드럽게 부푸는 흰 종이의 척후병(斥候兵), 한 꺼풀씩 몸에 들씌운 인두겁을 벗어 재웠다. 일그러진 가면을 차곡차곡 재웠다. 그것은 번번이 비정한 울음이었다. 여기 한 권의 시집이 당신 앞에 놓였다. 행간에서 심장까지 가 닿는 간극을 손톱으로 헤아리며, 책갈피를 넘기는 당신의 손가락도 있다. 나는 단 1초 동안 기쁘고, 다시 홀로 있으라. 마침내 당신은 내 지음(知音)이 되라.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안녕? 용기를 가져. 2012년 10월 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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