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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시종

출생:1929년, 대한민국 부산

최근작
2022년 7월 <일본풍토기>

니이가타

<장편시집 니이가타>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내게 최초의 마디[結節]가 된 시집이다. 내 첫 번째 시집 <지평선(地平線)>은 1955년 12월에 간행됐는데, 같은 해 5월 재일조선인운동도 그때까지의 민전(재일본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이었던 것이 조선총련(재일본조선총연합회)으로 조직체가 대체돼 갔다. 마치 중앙본부 내의 궁정극(宮廷劇)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행된 노선 전환이었다. 당시 나는 폐첨(肺尖)이 두 번째로 도진데다 장결핵(腸結核)까지 앓고 있어서, 이카이노(猪飼野)에 있는 작은 진료소에 앓아누워 있었다. 요양에 3년을 들이고서야 어떻게든 몸을 추슬러서 1956년 9월에 퇴원했다. 그런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들어갔다고 하는 조선총련의 조직적 위엄은 조국 북조선의 국가위신을 우산으로 삼아 주변을 추방할 태세로 높아져만 갔다. ‘민족적주체성’이라는 것이 갑작스럽게 강조되기 시작하더니, 신격화 된 김일성주석의 ‘유일사상체계’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주체성확립’이 행동원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북조선에서 쓰이던 조직구조나 일상의 활동양식까지 이곳 일본에서 표본 그대로 시행되길 요구했던 것이다. 민족교육은 물론이고 창작 표현 행위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인식의 동일화’가 공화국공민의 자격으로 가늠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의식의 정형화’임을 간파했다. 재일(在日) 세대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총련의 이러한 권위주의, 획일주의에 대해서, 나는 '장님과 뱀의 억지문답(盲と蛇の押し問答)'이라는 논고를 통해 이의를 주장했다. 1957년 7월 발행된 <진달래(チンダレ)> 18호에 실린 에세이였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소란이 벌어졌고, 나는 갑자기 반조직 분자, 민족허무주의자라는 견본으로 내세워져 모든 총련 조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됐다. 끝내는 북조선 작가동맹으로부터도 장문의 가혹한 비판문이 <문학신문(文学新聞)>에 게재돼, 김시종은 “양배추밭의 두더지”라고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즉 제거해야 할 자로서 비판을 당했던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일본에서도 총련의 중앙기관지인 <조선민보(朝鮮民報)>에 3회에 걸쳐서 전재되기도 했다. 이것으로 내 표현활동의 모든 것이 막혀버렸던 것이다. 얼마 뒤 조선총련의 전성기를 꾀하는 ‘귀국사업’이 일본적십자사의 합의 아래 큰 파도처럼 솟아올랐다. 내 원적지(原籍地)인 원산은 북조선 동해안 연안에 있다. 아버지의 고향인 그 원산은 해방 직후 우리 집 가족 전원이―그렇다고 해도 부모님과 나로 구성된 소가족이지만, 귀환하려고 하다가 38도선 근처에서 붙잡혔다. 그래서 아버지의 염원이었던 귀향(歸鄕)이 이뤄지지 못했던, 그곳은 원망 가득한 망향(望鄕)의 땅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원적지 북조선에 돌아가는 것은 일본에 왔던 당초부터 마음속에 간직한 집착이었다. 나는 사상적 악의 표본으로 지탄받기는 했으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기비판서를 제출하면 귀국선에 탈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 처지였다. 북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 어떠한 것인가 하고 별안간 따져 묻게 되었다. 결국 자기비판도 하지 않고, ‘귀국’도 하지 않았다. 남북조선을 찢어놓는 분단선인 38도선을 동쪽으로 연장하면 일본 니이가타시(新潟市)의 북측을 통과한다. 본국에서 넘을 수 없었던 38도선을 일본에서 넘는다고 하는 발상이 무엇보다 우선 있었다. 북조선으로 ‘귀국’하는 첫 번째 배는 1959년 말, 니이가타항에서 출항했는데, <장편시집 니이가타>는 그때 당시 거의 다 쓰여진 상태였다. 하지만, 출판까지는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모든 표현행위로부터 핍색(逼塞)을 강요당했던 터라, 오로지 일본에 남아 살아가고 있는 내 ‘재일’의 의미를 스스로 생각해 발견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른바 <장편시집 니이가타>는 내가 살아남아 생활하고 있는 일본에서 또다시 일본어에 맞붙어서 살아야만 하는 “재일을 살아가는(在日を生きる)” 것이 갖는 의미를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었던 시집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마디’가 된 시집이다. 1970년 겨울 마침내 나는 결심을 굳혔다. 10년간 보관만 하고 있던 <장편시집 니이가타>를 소속기관에 상의하지 않고 세상에 내놓아 조선총련으로부터의 모든 규제를 벗어 던졌다. 도저히 모국어로는 옮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장편시집 니이가타> 가 젊은 학구자 곽형덕 씨의 번역으로 이번에 본국의 글누림출판사에서 출간된다고 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에 휩싸였다. 초판 발행으로부터 45년이 지난 이 오래된 시집이, 자애가 깊은 모국어를 통해 번역 출판된다고 하는 것은 고집스러운 내 일본어 시가 정화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감격스럽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적는다.

이카이노시집 외

이쿠노구(生野区)에 있던 ‘이카이노’는 오사카시의 지명 변경으로 인해 1973년 2월 1일자로 없어지고 말았다. 육십 몇 년 전에 기적처럼 일본에 흘러들어온 내가, 기어가듯이 다다르게 된 재일동포의 일대 취락지이다. 태어나서 처음 임금을 받은 것도 이카이노에서이고, 굶주린 채 저녁 골목길을 떠돌다가 청어 굽는 냄새에 남몰래 짠 눈물을 삼킨 것도 이카이노에서였다. 고난의 고향을 버리고 온 자의 떳떳치 못한 마음 때문에 재일민족단체 상임활동가로 남 못지않은 조직 활동가가 되어간 것 역시 재일조선인운동의 거점이었던 이카이노에서였다. 그 ‘이카이노’가 1970년대에 주변 주민의 민주적 총의의 강력한 작동으로 오사카시 시가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상승 일변도였던 땅값과 집값이 ‘이카이노’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턱없이 깎인다느니 나아가 혼담에까지 지장을 가져온다느니 하며, 인접한 ‘나카가와초’, ‘모모다니 ○초메’에 병합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이카이노’는 있어도 없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아니, 없어도 있는 동네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로 하여금 <이카이노시집>을 쓰게 만든 것은 이처럼 표리 관계에 있는 존재의식이다. 아마도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통주저음처럼 울리고 있을 것이다. - '나와 이카이노와 재일', <이카이노시집>, 부분

잃어버린 계절

민망해서 그만두기는 했지만, 생각 같아서는 ‘김시종 서정 시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던 시집이다.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지만, 서정시라고 불리는 것의 대부분은 자연에 대한 찬미를 기조로 노래해왔다. 여기에서 ‘자연’은 자신의 심정이 투영된 것이다. ‘서정’이라는 시의 리듬도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정감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고, 이렇듯 서정과 정감 사이에는 어떠한 간극도 없다. 정감이 곧 서정인 것이다. 이 시집도 춘하추동 사계절을 제재로 하기에 당연히 ‘자연’이 주제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자연에 심정의 미묘함을 맡기는 것 같은 순정(純情)한 나는 그것으로부터 떠난 지 오래이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식민지 소년인 나를 열렬한 ‘황국(皇國) 소년’으로 만들어낸 예전의 일본어와 그 일본어가 자아내던 음률의 서정은 삶이 있는 한 대면해야 할 나의 의식의 업(業)과 같은 것이다. 일본적 서정에서 나는 제대로 벗어난 것인지 어떤지.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다. (…) 나는 일본 근대 서정시에 엄청난 영향을 받으며 자랐기에 사계절에 대한 관심 또한 누구 못지않게 강렬했다. 그만큼 계절이나 자연은 내 서정의 질을 검증하는 근거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껏 내가 지녀왔던 과제에 대한 답안을 지금, 두려운 마음으로 독자에게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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