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고정 독자를 갖고 있는 대표적 소설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안 팔렸다는 <시인>의 판매부수가 20만 부이며, 착실히 모으지는 못했지만 인세수입 총액은 100억원에 육박한다. 문학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그 이상 성공한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데뷰 이전 이문열의 삶은 팍팍했다. 이문열의 아버지는 대지 200평에 40간 짜리 본가를 둔 천석꾼에다 영국 유학까지 다녀 온 엘리트로, 서울대 농대 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9.28 수복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월북하면서 그의 가문은 대공수사기관으로부터 끊임없이 감시 받는 사찰대상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가세는 기울었고 그의 인생도 순탄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제외하곤 전부 중퇴로 끝난 성장기, 서울대 사범대를 중도에 그만두고 밀양 석골사에 틀어박혀 준비한 사법시험, 그러나 세 번의 연이은 실패, 고시를 단념하고 방향을 틀어 신춘문예에 도전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았다. 훗날의 출세작 <사람의 아들>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지만 문전박대 당할 뿐, 이도 저도 안된 그에게 군대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제대 후 대구 고시학원 강사를 거쳐 77년 「대구매일신문」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당선작 없는 가작에 뽑히면서 비로소 문단에 첫발을 디뎠다. 이듬해 「대구매일신문」에 입사한 그는 다시 1년 후 <사람의 아들>로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으며, 1984년부터는 상경하여 전업 작가로 나섰다.
문인으로서 이문열이 갖는 중요한 장점 가운데 하나는 항상 독자가 누구일지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 데 있다. 이문열이 강조하는 '독자'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독자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독자다. 어떤 특정 유형의 소설을 좋아할 수 있는 특정 유형의 독자다.
이문열의 글이 힘과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이런 '특정 유형의 독자'를 올바로 설정하고, 창작 기간 내내 그들과 대화하는 심정으로 계속하여 글을 검토해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문열은, 독자를 올바르게 상정하는 것은 모든 창작의 출발이자 창작의 전 과정을 시종 버티게 해주는 힘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독자이던 시절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그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7종, 이탈리아에서 4종, 스페인 3종, 네덜란드와 독일 영국 러시아 각각 하나, 그리고 일본과 중국 등에서 소개됐다. 프랑스에서는 도합 5만 부 가량을 찍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