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거둔 햇메밀, 눈 쌓이면 ‘제철 막국수’로 거듭난다.”
2019년 1월 5일~6일자 중앙SUNDAY 24면, ‘FOOD’의 타이틀이다. 첫 장편소설을 내는 내 마음이 꼭 그랬다. 그것은 30년 메밀과 막국수를 공부해 온 과학자 이력의 비유로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지만 늦깎이로 소설의 바다에 뛰어든 문학적 소망에 대한 비유로도 어울리는 말이다.
지난해 세모(歲暮)에 첫 단편소설집 『산토 치엘로(하느님 맙소사!)』를 펴낸 데 이어 기해년 세시(歲時)에는 첫 장편소설 『춘천여자, 송혜란』을 내게 되어 기쁘다. ‘과학적 창조와 문학적 창작’은 내게 언제나 시작일 뿐이다. 어느 것도 완성의 경지에 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는 만용(蠻勇)은 뿌리 깊은 빚 갚음에 대한 염원에 연유한다.
대학 2학년 때 농촌봉사활동에서 만나 같이 땅을 파며 잡아 본 13살 재건학교 소년의 돌같이 굳은 손을 잊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손이 돌처럼 단단할까? 그때 여리고 여려서 삽질 몇 번에 손바닥에 물집이 잡힌 나의 ‘부끄러운 손’은 지금도 내놓기가 민망하다. 터뜨려 버리면 그만인 물집보다 더 불순한 각질 투성이의 손으로 배불리 밥을 먹고 있는 것은 ‘빚’에 다름 아니다. 논문 몇 편과 소설 몇 편으로 갚아질 빚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새벽잠을 줄여 한 땀 한 땀 헤진 ‘통섭과 공유’ 의식을 깁는 작업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다. 현실 속의 나는 무력하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서라도 잘 살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 생각 때문에.
막국수와 메밀의 고장, 춘천. 그곳에서 나고 자란 한 여인의 고향 사랑. 메밀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생명을 지키는 농심(農心) 같은 사랑으로 봄 시내처럼 산 ‘춘천여자, 송혜란’, 우리들의 누이로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며 기해년의 새 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