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저먼의 영화를 필름으로 처음 본 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영국영화제에서 상영된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말기의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듯한 이미지들로 눈을 매혹했고, 의도적으로 배치된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이 낯선 충격을 주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 때문에 가슴 아팠다. 성과 정치와 예술에 대한 매섭게 날선 통찰 또한 놀라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영화였다. '카라바조'가 보여준 이 모든 특징들은 이후에 만난 저먼의 다른 영화들 역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데뷔작인 '세바스찬'부터 유작인 '블루'까지, 그의 모든 영화들은 내러티브가 있든 없든, 역사물이든 현대를 다루든, 실험적이고 새로웠으며 지극히 정치적이면서도 놀랍도록 감동적이었다.
....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데릭 저먼의 수퍼 8mm 작품들에 대한 세세한 분석이다. 오프레이가 저먼의 대표적인 장편들뿐만 아니라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수퍼 8mm 작품에 대해 긴 시간을 들여 분석하고 있는 까닭은, 그의 삶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독창적인 미학과 정치학이 바로 '홈무비'와 '작은 몸짓의 영화'라는 말로 대변되는 수퍼 8mm 작업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먼의 '개인적인' 작업을 탐사하는 이 과정은 영국의 하위문화와 언더그라운드 예술에 대한 흥미진진한 보고가 되고 있기도 하다.
데릭 저먼은 아주 오랜 기간을 죽음과 직면하여 죽음의 공포와 싸웠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공포에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고, 에이즈의 발병으로 신체가 무너져가던 바로 그 시기에 오히려 가장 열정적으로 창작 작업을 계속했다. 차가움 속에 생에 대한 열망이 불꽃처럼 반짝이는 저먼의 작품이 주는 매혹은, 죽음과 소외의 고통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순수함을 믿었던 저먼의 삶이 주는 감동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이 예외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영화를 만들었던 한 예술가와 만나는 기회가 되기를, 그리고 그의 삶과 영화의 매혹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