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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 문장

로베르트 발저가 살면서 남긴 흔적은 너무나 희미해서 바람이라도 한 자락 불면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다. 적어도 1913년 초 스위스로 돌아온 뒤부터는, 아니 실제로는 아주 처음부터 그는 세상과 더없이 덧없는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어왔다.

전원에 머문 날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진실의 이미지는 종종 고고히 등불을 들고 걸어가는 성자의 모습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가만히 두어도 언젠가 발견되며 누구든 보기만 하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선명한 불빛이 아니다. 진실은 주관적인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사회적 관계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진실은 여러 사람이 합리적 이성에 기대어 주장하고 경청하며, 입증하고 반박하며, 대화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살짝 두건을 걷고 얼굴을 드러낸다.

세월호를 기록하다. 오준호 지음

1974년 11월 말,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로테 아이스너가 병세가 위중하여 곧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 시점에 독일 영화계가 그녀를 잃을 수는 없으며 우리는 그 죽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나는 말했다. 재킷과 나침반, 그 외의 필요한 물품을 더플백에 챙겼다. 장화는 새것이고 튼튼해서 충분히 믿을 만했다. 걸어서 가면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파리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이기를 원했다.

얼음 속을 걷다. 베르너 헤어조크 지음, 안상원 옮김

저 멀리 한두 개 정도라도 새로운 행성이 숨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행성이 없는 잘못된 방향의 하늘을 뒤져왔던 건 아닐까? 이 새로운 행성이 숨어 있을 법한 모든 하늘을 전부 찾아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새로운 행성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우리의 그물이 아직 놓치고 있는 숨어 있는 고래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마이크 브라운 지음, 지웅배 옮김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 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이운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