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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지탱해 온 불빛들에 대하여" 작가 김연수는 이 책을 '연필로 쓴 소설'이라 말한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기억. 박제화된 기억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꺼내어 되새길 수 있는 그런 기억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소도시 김천의 제과점집 아들로 자라던 어린 시절을 불러낸다. 가겟돈을 훔쳐 달아난 게이코를 기억하고('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일식을 보며 깨달았던 첫사랑을 불러온다.('첫사랑') 애비에미도 몰라보던 패륜아 '똥개'를 떠올리고,('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 끝내 국밥집이 되어버린 제과점을 추억한다.('뉴욕제과점')
이제 어른이 된 작가는 문득 두려움에 휩싸인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아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알던 풍경은 모두 변해갈테고. 내가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버릴텐데...
그리하여 그는 자기 안의 불빛들을 하나둘씩 꺼내보기 시작한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 열어대는 아이처럼' 뻔히 알고 있는 지난 추억들을 계속해서 되새기는 것. 그러한 행위를 통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살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계속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386세대 작가답게 80년대에 대한 이야기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는 '칼날 모양을 닮은 상처'에 대해 회상한다. 아픔과 슬픔의 결 하나하나를 되짚으며 어둠속을 걷는 '봉우'('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는 바로 지은이 자신이다. 그는 삶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침투해있는 그 '상처'를 되새긴다.
80년대를 기억하고, 그날의 광주를 기억하고, 가톨릭신도 학생이 분신자살을 감행하던 시대를 기억한다.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남은 그 시절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그는 쉽게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저 신문을 거듭 읽는 것만으로 그들을 용서했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줄 수 없다고 말할 뿐. 그는 추억의 불빛에 의지한 채, 상처의 결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어둠 속을 걸어간다. '따뜻한 물기처럼 뺨에 와닿는 어둠'은 어느덧 눈물을 닮아 있다.
결국 이 책은 그가 소중히 간직해온 '불빛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지만 따스하게, 삶에 온기를 전하는 불빛.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 박하영(2002-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