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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이름:김신용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5년, 부산 (양자리)

직업:시인 소설가

최근작
2023년 12월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개같은 날들의 기록

이 시집을 처음 출간할 때, 시인의 말을 쓰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슴만 답답하고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시에 할 말이 다 들어 있는데 무슨 말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는 아마 이런 생각도 한 듯하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시인의 말〉이 없다. 이 침묵이, 빈 공간이, 〈시인의 말〉인 것처럼. 어떤 말도 사족인 것처럼. 이 사족에, 사족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개같은 날들의 기록’이 현재진행형이 아니기를……”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

시집 『잉어』의 첫 장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거미줄은 혹시 이슬의 벤치가 아닐까? 떠돌다 갈 곳이 없어 쓸쓸히 앉아 있는 그런 공원의 벤치―. 어쩌면 이번의 짧은 시편들은, 그런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시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슬의 벤치인지도 모르겠다. 2021년 봄 김신용

바자울에 기대다

언젠가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들은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에 적응해나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감정을 차갑게 결빙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글을 읽었었다. 가슴이 시렸다. 그러면 내 피를 차갑게 결빙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이, 이 의문이, 이번의 시편들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그림자가 무겁게 덮힌 내 무의식 속에서도, 아마 그런 자문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올 겨울에는 유난히 폭설이 잦다. 지금 바깥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겨울이다. 이번의 시편들이, 이 겨울에도 따뜻한 꽃 한 송이였으면 좋겠다. 그런 따뜻한 온기였으면 좋겠다. 2011년 겨울, 섬말에서

버려진 사람들

1 나는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해야 했다. 바라보면 언제나 막막했던 시멘트의 벌판, 서로의 체온으 로 천막삼아 추위를 이겨야 했던 날들... 그 황량한 삶 속에서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해야 했던 나의 사랑법 그것은 내 생존 방법이었으며 내 시의 명제이자출발점이기도 했다. 2 오늘도 오두운 삶의 현장에서 신움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부빈다는 것

첫 시집을 낸 지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까마득하기도 하고 엊그제 같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상도 변했겠지만 나 또한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다섯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세 권의 시집이 절판되었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한 가지만은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었다. 예컨대 첫 시집을 낼 때의 그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랬다. 나는 첫 시집을 낼 때, 단 한 사람의 독자라도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세계를 눈여겨 봐주기를 바랐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우리 삶의 부끄러운 부분을 기억해주기를 바랐었다. 그 바람은 다섯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 시선집을 묶는 동안에도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 같다. 서점에서 이미 볼 수 없는 세 권의 시집, 즉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와 최근에 출간된 <환상통> <도장골 시편>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유독 도드라지는 시들을 選했다. 그리고 그 시집을 다시 읽는 동안 내게는 두 가지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랑의 피와 노동의 피였다. 아시다시피 부랑의 피는 세상을 거칠 것 없이 떠돌고 싶은 피다. 그러니까 폐허에서 폐허로 돌아가는 피다. 그러나 노동의 피는 그 폐허에 어떻게 하든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워야 하는 피다. 나는 다섯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독자가 되어, 그 두 개의 피가 흐르면서 충돌하고 때로는 화해하고 또 때로는 적대적이 되면서 서로 뒤섞이며 흐르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이 충돌과 화해도 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양면성이랄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시집들 속에서 이런 충돌과 화해의 의미가 도드라진 시들을 選하면서, 이 시선집의 제목을 <부빈다는 것>으로 정했다. 그러고 보니 이 충돌과 화해도 바로 이 세계와 서로 살을 부비고 있는 삶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어쨌건 절판된 세 권의 시집도 되살리면서 시인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이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시들을 골랐다. 그것이 얼마나 충족되었는지는 몰라도 이 시선집 앞에서 내가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시선집을 기꺼이 출간해준 ‘천년의시작’의 김태석 발행인에게도 그동안 못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모쪼록 이 시선집이 또 하나의 의미의 시집이 되기를….

부빈다는 것

첫 시집을 낸 지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까마득하기도 하고 엊그제 같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상도 변했겠지만 나 또한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다섯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세 권의 시집이 절판되었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한 가지만은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었다. 예컨대 첫 시집을 낼 때의 그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랬다. 나는 첫 시집을 낼 때, 단 한 사람의 독자라도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세계를 눈여겨 봐주기를 바랐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우리 삶의 부끄러운 부분을 기억해주기를 바랐었다. 그 바람은 다섯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 시선집을 묶는 동안에도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 같다. 서점에서 이미 볼 수 없는 세 권의 시집, 즉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와 최근에 출간된 『환상통』 『도장골 시편』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유독 도드라지는 시들을 選했다. 그리고 그 시집을 다시 읽는 동안 내게는 두 가지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랑의 피와 노동의 피였다. 아시다시피 부랑의 피는 세상을 거칠 것 없이 떠돌고 싶은 피다. 그러니까 폐허에서 폐허로 돌아가는 피다. 그러나 노동의 피는 그 폐허에 어떻게 하든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워야 하는 피다. 나는 다섯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독자가 되어, 그 두 개의 피가 흐르면서 충돌하고 때로는 화해하고 또 때로는 적대적이 되면서 서로 뒤섞이며 흐르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이 충돌과 화해도 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양면성이랄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시집들 속에서 이런 충돌과 화해의 의미가 도드라진 시들을 選하면서, 이 시선집의 제목을 『부빈다는 것』으로 정했다. 그러고 보니 이 충돌과 화해도 바로 이 세계와 서로 살을 부비고 있는 삶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어쨌건 절판된 세 권의 시집도 되살리면서 시인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이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시들을 골랐다. 그것이 얼마나 충족되었는지는 몰라도 이 시선집 앞에서 내가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시선집을 기꺼이 출간해준 ‘천년의시작’의 김태석 발행인에게도 그동안 못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모쪼록 이 시선집이 또 하나의 의미의 시집이 되기를…. 2009년 5월

비는 사람의 몸속에도 내려

적(滴)은 물방울이다 물방울은 언제나 떨어짐을 예비하고 있다 그 물방울은 빛난다 떨어짐이 날개이기 때문이다 추락과 날개의 만남, 이것이 물방울의 생이다 이번 적(滴) 연작은 떨어짐이 빚어내는 무수한 이미지의 변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떨어짐이 날개인 물방울들 그래서 물방울의 얼굴은 빛난다 추락이 비상인 생들 한없이 가벼워 무게가 없는 존재들 2019년

새를 아세요?

한 사람에 대해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냥 단순한 추억일까? 회상일까? 그러나 기억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더구나 소설로 쓴다는 것은, 그 기억에 대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많은 것들을 만나고 또 보고 겪는다. 그래,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기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의 글쓰기도 그런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것.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줄곧 망설였고 갈등에 시달렸다. 이것도 소설일 수 있을까?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을까?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것만 글로 써왔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처럼 말이다. 이 작가도 “나는 내가 체험한 것만 글로 써왔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어떤 소설적 상상력이나 허구에 기댄 형식, 줄거리의 플롯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냥 체험의 현실적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 펜을 자연스레 놓아두었었다. 어쩌면 이런 형식의 글을 소설 이전의 소설, 소설 이후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었다. 그것이 소설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차지해두자.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인생의 고난을 깨닫게 될 때, 아름다움은 더 깊이 이해된다”라는 글을 읽었었다. 아마 미술에 관련된 책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그 의미를 늘 염두에 두고 글을 끝맺었었다. 그리고 내가 만난 한 여자의 생을 통해 고난이 가져다주는 한 아름다움과 만났었다. 그 아름다움이 더 큰 고통이었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고통 속에서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똑똑히 직시했었다. 현재가 과거의 미래이며 미래의 과거라는 것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한마디만은 결코 잊지 않았다. 애이불비(哀而不悲)―슬프지만 결코 겉으로 슬픔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그 느낌으로 지금 마지막 이 글까지 쓰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들이 흘러갈지 모르지만 과거의 미래인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 哀而不悲―.

잉어

배추의 잎은 몇 겹일까, 그냥 열두 겹이라고 하자. 한 잎 열면 한 잎, 한 잎 열면 또 한 잎 열두 겹의 문을 열어야 얼굴이 보일 것 같은― 그러나 마지막 한 잎이 감싸고 있는 것도, 또 한 잎이어서 한 잎을 감싸기 위해 저렇듯 무수한 잎으로 자신을 감싼 저 한 잎의 생을 만나기 위해, 또 몇 겹의 잎을 벗겨야 할까 마치 피에타, 피에타처럼 마지막 한 잎이 안고 있는 것도 연하디연한 숨결의 한 잎이니……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또 한 권의 시집을 묶는다. 시선집을 포함해서 열한 번째의 시집이다. 첫 시집을 낸 지 36년 만의 일이니 과작寡作일 수도 있고 다작多作이라면 다작일 수도 있겠다. 매번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 시집은 또 어떤 길을 걸어갈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러나 어떤 길을 걷든 자신의 운명이니 개의치 말자 하는 생각이다. 그저 물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만들어 내는 동심원을 닮은 작고 동그란 파문 같은 보폭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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