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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고봉준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0년, 대한민국 부산

최근작
2022년 6월 <김수영에서 김수영으로>

문학 이후의 문학

지난 5년 ‘세월호’와 ‘촛불’은 우리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 그 사건들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부정의의 실체를 드러내어 정치에 대한 대중의 감각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세월호’와 ‘촛불’로 인해 바뀐 것은 정치만이 아니다.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한국문학 또한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었다. 세대와 감수성의 층위 모두에서 우리 시대의 문학은 ‘세월호’ 이전의 문학과 선명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사건들을 지나오면서 누군가는 무능력한 언어로 인해 무너져 내렸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굳게 지켜온 문학에 대한 기준과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고통을 경험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우리 시대가 마주한 사건들은 문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바꿔놓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을 계기로 표면화된 페미니즘 담론은 문학의 창작-소비-비평 시스템에 새로운 시각을 가져왔다. ‘문학 이후의 문학’이라는 제목은 이런 일련의 변화된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90년대의 저 유명한 ‘포스트’ 논쟁이 증명하듯이 ‘이후’는 ‘나중-시간’의 기호이면서 ‘단절/변화’의 기호이기도 하다. ‘이후’라는 명칭이 문제적인 까닭은 ‘나중-시간’과 ‘단절/변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도, 나아가 그것들이 매끄럽게 분리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 이후의 문학’이라는 제목을 사실판단보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기를 부탁드린다.

유령들

유령의 시대다. 우리의 삶이 유령적 삶이 되고, 도처에서 통치성의 유령들이 양산되고 있다. 나는 이따금씩 유령과 함께 살고 있다고 느낌을 넘어 나 자신이 유령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유령’에 관한 두 개의 버전이 있다고 말해도 될까? 아무래도 이미 죽었으나 충분히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유령과, 살아 있으나 시체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를 ‘유령’이라는 명칭으로 함께 부르는 것은 이상하다. 한 종류의 유령은 미래에 속하고, 다른 한 종류의 유령은 현재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 종류의 유령은 충분히 애도되지 못해서 출현하고, 다른 한 종류의 유령은 죽음의 절차도 없이 지나치게 애도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굳이 말하면, 후자다. 유령의 최대 문제는 존재 자체가 문제시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때조차 그들은 문제적이다. 현재에 속하지만 존재감을 부정당한 것들, 그들의 언어는 발화되는 동시에 ‘소리’가 된다. 그들은 ‘안’에 있지만 항상 ‘바깥’이라고 간주된다. 아니, 유령은 ‘안’에 있는 ‘바깥’의 다른 이름이다. 유령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 그들은 쉼 없이 떠들어댐으로써 권력의 주파수를 교란하고 새로운 언어를 생산한다. 문학이란 이 언어가 특정한 스타일로 배열된 것이고, 비평이란 이 언어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관념적인 것을 구성하는 행위가 아닐까. 우리는 문학이 유령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1부에는 이론적인 성격이 뚜렷한 글들을 묶었다. 연극에 비유하자면, 1부의 주연은 수용소, 정치, 윤리 같은 개념어들이다. 한때는 문학을 중심으로 세상이 회전한다고 믿었다. 이 개념어들은 그 믿음이 깨진 자리에서 나를 지탱해 준 고마운 파트너들이다. 특히 ‘시와 정치’에 관한 세 편의 글은 짧은 시간에 연이어 발표되었지만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담고 있다. 한 편의 비평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다. 비평의 결론은 언제나 서론의 일부이다. 생각의 변화가 없지 않았으나 결론의 정당성을 위해 서론을 생략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판단하여 수정 없이 싣는다. 2부에는 두 번째 평론집 이후에 발표한 시인론을 묶었고, 3부에서는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시인들의 시를 대상으로 쓴 주제론을 묶었다. 시집과 시인을 대상으로 한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예술작품은 미래의 반향에 의한 떨림을 드러내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벤야민의 충고를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것이 비평의 원점일까. 나는 벤야민의 이 말을, 문학은 작가 개인의 비밀스러운 내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정한 시대의 의미심장한 징후이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래서 나는 시인론을 쓸 때마다 시인에게 ‘나’를 과도하게 투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공명을 부정하지 않은 범위에서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취한다. 오해와 달리, 공명이란 일정한 거리를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지 않은가. 완전한 일체, 거기에서 ‘나’는 사라진다. 그렇지만 시인들 또한 현대의 유령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때마다 이 의도들은 심각하게 흔들린다. 여기에 묶인 시인론은 그 흔들림의 결과들이고, 유령들에 낚인 기록들이다. 4부는 대개 작품을 대상으로 하지 않은 비평과 메타비평을 묶었다. 혹자는 메타담론이라는 비평의 운명에서 종속성을 읽는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된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치 있는 것들이 나중에 오기도 한다. 내게 비평은 작품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 사유의 물꼬를 트는 일이다. 그 여정을 함께 걸어준 시인들과 시집들이 있어서 나의 글쓰기는 행복했다. 딸 은결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고,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자전거를 아이가 제법 속도를 내며 달릴 때 또 아팠다. 가끔씩 글을 쓰는 일이 이기적인 행위인 것 같아 불편할 때가 있다. 은결이가 아플 때, 아내가 아프다고 말할 때, 밀린 원고와 씨름하고 있는 나는 짜증 섞인 소리를 낸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일은 물론 한 인간의 삶을 바꾸는 데도 무용한 이 시대에 문학이라니. 이 책은 아이와 함께 보내야 할 시간을 탕진해 버린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심리적인 부채감을 결코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견뎌 준 아내와 딸 은결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내의 뱃속에서 이 책의 출간과 시간 경쟁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출생이 기다려지는 이즈음이다.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어려운 출판환경에도 불구하고 상품성이 없는 이 책의 출간을 허락해 준 천년의시작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험난한 비평적 여정의 동반자 『작가와비평』 편집동인들과 『딩아돌하』 편집위원들께도 신세를 많이 졌다. 아들에 이어 손녀까지 떠맡아 준 부모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공부하고 글을 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 번째 평론집을 준비하면서 롤랑 바르트의 한 문장을 얻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 그렇지만 결국 말하지 못한 것을 타인의 책에서 읽는 일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지만, 비평의 존재감을 환기시켜 주는 아름다운 문장이어서 여기에 밝혀둔다. 당분간은 이 문장과 더불어 살아야겠다. 다음 문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비평은 과거의 진실에 대한 경의도 아니며, 타자의 진실에 대한 경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관념적인 것의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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