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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현택훈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4년, 대한민국 제주

최근작
2024년 4월 <나의 작은 거인에게>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이별을 슬퍼하며 청춘을 다 보내니 후회가 남는다. 헤어지고 난 후에도 밥맛을 잃지 않아서 내 사랑을 의심했다. 세상 앞에서 좀 더 의젓해야 하는데 울 궁리만 하는 난 참 어리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으려 시를 썼더니 그 사람이 떠나지 않고 옆에 있다. 그 사람이 잘 떨어지지 않아 난처하다. 제발 이제, 그만 잊어야 하는데 당신은 내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귀를 막아도 다 들린다. 바람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버스 차창에 흐르는 노랫소리, 테니스장 롤러 구르는 소리, 시집 책장 넘기는……. 2018년 10월 서귀포에서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가면

작년 여름에 사귄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또 놀러 가야지 어렸을 때 밭에 가는데,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 소리는 어떤 새가 우는 소리야?” “응, 저 소리는 새알이 비에 젖을까 봐 엄마 새가 우는 소리야.”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엄마는 몇 해 뒤 산 너머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새 소리는 멧비둘기 소리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구구구구구. 장마 무렵에 더 많이 들린다. 늦잠을 자는 내게 엄마가 굼벵이 같다고 말했다. 그런 날엔 매미를 꿈꿨다. 흙바닥에서 놀고 있는데 할머니가 내게 땅강아지 같다고 말했다. 그런 날엔 흙 속에서도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산길을 걷다가 나비를 발견하면 나비 따라 산속을 돌아다녔다. 지네를 잡겠다고 친구들과 들춰본 돌 밑에서 잠든 뱀을 보고 비명을 질렀을 때가 행복했다. 중고생 시절, 과목 중에 물리는 어려웠지만 생물은 재미있었다. 나이가 들어 다시 펼쳐본 도감을 통해 내가 여겼던 것보다 훨씬 넓은 우주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를 쓰면서 제주의 생태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어렸을 때 놀았던 풀숲에 있는 식물이나 곤충은 모두 이름이 있다. 그 이름부터 먼저 불러준 다음에야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나랑 놀아주면 좋겠다. 길을 걷는데 제비가 낮게 날며 곧 비가 온다고 말해준다. 작년 여름에 사귄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또 놀러 가야지. 할 말은 많지만, 노루가 곶자왈에 함께 가자며 창문을 두드려서 이제 그만 써야겠다.

마음에 드는 글씨

밤에 우동 한 그릇 먹으러 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 이 노래는 참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아 플레이리스트 만드는 건 유언을 쓰는 것 같아 해 지면 우리 더 외로워질 테니 서둘러 풀밭에 가자

제주어 마음사전

나는 제주도 부루기에서 태어났습니다. 감귤밭에 딸린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할머니가 말하는 제주어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주어는 내 마음속에서 감귤처럼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학교가 끝나 집에 가면 엄마는 제주어로 내게 소도리를 했습니다. 엄마는 마치 만담가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도 엄마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주어는 내 마음에 들어와 집을 지었습니다. 나는 그 집에서 시를 써왔습니다. 시를 쓰면서 제주어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나를 자라게 한 이 제주어를 어떻게 시어로 드러낼 것인가. 백석은 평안도말로 공동체의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평안도말을 몰라도 그 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어로 시를 보여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나의 제주어 사전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했습니다. 이 단계는 소멸 직전의 단계라고 합니다. 언어는 그 지역의 문화, 역사, 정신 등이 총망라되어 나타납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시를 쓰는 나는 결국 시에서 제주어를 품어야 하는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주어 사전을 들여다보며, 시의 언어를 생각합니다. 오는 일요일에는 오름에 올라 제주의 바람을 맞을 겁니다. 제주의 바람에는 제주어가 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운이 좋으면 그 바람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어떤 바람은 자울락자울락 붑니다. 눈물이 스며 있는 바람, 그 바람의 언어를 맞기 위해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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