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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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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문장의 무게>

모순수업

모순은‘논리의 피’를 먹고 자란다. 3년 동안 ‘모순’은 나와 함께 살았다. 나는 내 속에서 ‘논리의 피’를 먹으며 단단하게 자라는 ‘모순’을 느낄 때마다 행복했다. 스승의 칼날 같은, 하지만 제자에게는 마냥 모순으로만 보이는 그런 질문과 대답들 속에서 나는 나만의 길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내가 나만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모순은 이미 내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세상은 온통 모순이 되어 내게로 걸어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벙어리만이 거대한 목소리로 진리를 외칠 수 있고, 귀머거리만이 만 리 밖의 진실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맺음말> 중에서

비와 바람의 기억

비와 바람이 보여준 삶의 속살들 나는 두 개의 얼굴로 인생을 만났다. 하나는 비요, 다른 하나는 바람이었다. 말을 거두어 소리를 죽이니 비는 삶을 노래했고, 눈을 감아 존재하는 것들을 지우니 바람은 삶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비와 바람이 건네준 삶의 속살은 아름다운 여인의 눈물을 닮아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 눈물을 어딘가에 담고 싶었다. 가슴에 또는 기억 속에. 하지만 그 어떤 곳에도 그 눈물을 오롯이 담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쉽게 흘러넘치거나 금방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눈물에 어울리는 작은 집을 지어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설픈 목수인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힘겹고 버거운 일이었다. 바닥에 필요한 단어, 기둥으로 쓸 단어, 지붕으로 덮을 단어들을 찾아 헤매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동안 여러 계절이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작은 집 한 채가 힘겹게 완성되었다. 그런데 집이 너무 작아서일까, 문이 잘 보이지 않고, 보인다고 해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 더욱 이상한 것은 눈을 크게 뜨면 뜰수록 문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둥을 흔들어 문을 열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문패에 쓰인 글이 열쇠가 아닐까? “감각이 아닌 몸으로”.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여행, 그 떨림에 관하여 방랑자로 산다는 것, 그것은 고독하면서도 황홀한 운명의 몸짓이다. 사막의 추위 속에서 별들의 따뜻함을 건졌고, 아마존 밀림에서 악어의 눈물과 마주쳤으며, 페루의 갈대 섬 위에서 떠도는 작은 섬이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원시 부족에게서 원초적인 사랑도 얻었다. 늘 외로웠으며, 이방인이었다. 어쩌면 나의 방랑은 안락한 삶의 방식을 거부한 벌, 고단한 유배의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곳에, 푹 꺼진 소파에 나의 육신과 영혼을 가두지 못한 죗값을 치렀던 것이리라. 하지만 천상에서 버려진 것이 결코 슬프지는 않았다. 천상의 규율을 따르는 것보다 바람 같은 영혼의 노예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랑의 삶은 결코 존재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직, 영혼과 길의 방향에 구속될 뿐이다. 길이 열려 있는 쪽, 특히 작고 굽은, 낯선 길이라면 그곳은 방랑자들의 영혼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그 길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할지라도 그곳이 가지 못할 곳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방랑은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 갑작스런 변화들은 고요했던 영혼을 흔들고, 작은 가슴을 긴장감으로 요동치게 하며, 단정했던 머리칼을 미친 사람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런 상황들은 오히려 겉돌기만 했던 인생의 지루한 궤도를 버리고, 살아 있는 ‘진짜’ 속으로 영혼을 진입시킨다. 너무나 많은 생각과 보이는 것들이 나를 겁쟁이로 만들어버렸다면, 그것들을 지워버리고 그래서 나조차 잃어버릴 때, 마침내 방랑이 시작되고, 밖이 아닌 ‘진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그것만이 방랑의 유일한 조건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리고 더 큰 우주를 얻었다. 방랑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선물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는 《구도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지의 땅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만 있을까요? 모험심을 가진 자에게는 모든 곳이 미지의 땅입니다. 하지만 나태하고 패배한 영혼에게는 광대한 분지와 북극성조차도 시시한 장소일 것입니다. (……) 미지의 땅으로 통하는 길은 당신이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이유입니다.” 방랑자의 길은 고독한 구도의 과정이다. 그들에게 신은 새롭게 만나는 ‘모든 것’들이다. 새로운 것, 그것은 익숙한 것에 갇힌 나를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화려함으로 충혈된 눈동자에 푸른 바다의 휴식을 주고, 일정한 리듬에 젖어버린 귀에 불규칙한 음표들을 선물하며, 단 것에만 길들여진 혀에 알싸한 고추의 맛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난 것들과의 대화는 방랑자의 ‘기도’가 되며,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신의 ‘선물’이 된다. 그래서 방랑자들은 그 시간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오직 그것에 순응할 뿐이다. 작은 존재에 불과한 방랑자의 길은 고독한 구도의 과정이다. 그들에게 신은 새롭게 만나는 ‘모든 것’들이다. 새로운 것, 그것은 익숙한 것에 갇힌 나를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낯선 것들 속에는 내가 보지 못한 또다른 우주가 있다. 하나의 작은 별에 불과한 나는, 광활한 우주가 써놓은 시를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우주가 써놓은 그 ‘낯선 시’는 이해가 아닌 교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만지기만 하면, 시는 그의 흰 속살을 기분 좋게 내비쳐준다. 그 시들을 만지는 순간, 나의 삶도 마법같이 새로운 것들로 변신한다. 속도가 사라지고, 한없이 게을러지며, 가던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아픈 상처는 꽃으로 피어난다. 나와 다른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은 나의 존재방식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우주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결코 갈 수 없는 곳도 아니다. 나의 길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그 옆길에, 당신이 동경하던 우주가 있을 것이며, 그 우주가 써놓은 수많은 시들이 별꽃으로 피어 있을 것이다. 방랑의 삶은 다른 은하계의 작은 별이 써놓은 한 편의 ‘시’임이 틀림없다. 방랑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어렵기만 한 그런 시 말이다. 나는 지금 그 시의 3행쯤을 걷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영혼은 시의 낯선 단어들 위에서 비틀거리거나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완전함에서 불완전함으로 가고 있는 것이며, 평온에서 불안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3행이 지어놓은 여관, 쉼표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스위스의 양치기 소녀가,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인력거를 끌던 아저씨가, 사하라의 뜨거운 사막에서 검은 눈을 맞춘 히잡 쓴 여인이 함께 묵고 있다. 아마도, 영혼에 박혀 있는 타인의 시선과 도덕의 바퀴를 모두 제거할 때쯤이면, 마지막 시행 위를 걷게 될 것이다. 방랑은 런던에서 만난 안개와도 같은 것이다. 안개는 모든 것들을 꿈으로 만들어버리는 신비의 동화다. 꿈속에서 방황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쾌락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방랑자는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개가 바람의 힘을 빌려 제멋대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핥고, 나무들을 감추고, 건물의 목을 감싸주고 있을 때, 안개의 이런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안개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꿈과 방랑자의 영원한 옷이 되기 위함이다.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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