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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김경욱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1년,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직업:소설가

최근작
2023년 8월 <너는 지구에 글 쓰러 오지 않았다>

이 저자의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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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1번째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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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번째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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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
3번째
마니아

개와 늑대의 시간

어둠이 깊어져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서야 나는 그 기이한 감정이 실은 서글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불빛은 너무나 취약했다. 들에 핀 꽃처럼 무심한 한 줄기 바람에도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해한 어떤 악의(惡意)에 의해서도. 30여 년 전 ‘남한’의 벽촌에서 하룻밤새 동네 사람 쉰여섯을 총으로 쏴 죽인 순경은 불 켜진 집만 노렸다고 했다.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새까만 지평선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전된 총을 들고 빛을 찾아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자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두려움 속에 자문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실은 ‘에필로그’로 작가의 말을 대신할 셈이었다. 작중인물들이 그 후 어찌 되었다는 식의 글을 덧붙일까 했다. “끝이 뭐 이리 허무해”라는 독자들의 푸념이 무섭기도 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어울리는 마무리 같기도 해서였다. “박만길과 손영희는 양가 유족의 뜻에 따라 영혼 결혼식으로 맺어져 나란히 묻혔다. 수잔 여사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묘비에는 ‘일흔아홉 번의 가을을 즐겼다’는 글이 새겨졌다. 손백기는 궁지면 발전위원회장으로서 이듬해 초에는 아스팔트 진입로 완공식에서, 여름에는 상곡 유원지 개장식에서 테이프를 끊었다. 정부의 전격적이고 파격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철호는……” 마음을 바꾼 것은 희생자가 너무 많아서였다. 그들의 빛이 꺼졌다는 사실을 굳이 재차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11장의 주인공을 위해서는 한마디 남기고 싶다. “고동배는 2년 뒤 롯데 자이언츠가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로 타자들을 압도한 에이스를 앞세워 우승하던 순간, 하늘나라에서 뛸 듯이 기뻐했다.” 2016년 4월

거울 보는 남자

작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새 문서창을 여는 나에겐 몇 달여 품어오던 이야깃감이 두어 개 있었지만 그 계절이 끝날 즈음 완성된 원고는 그것들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시애틀의 한 신문에 실린 기사 때문이었다. 죽은 남편의 얼굴을 이식한 남자와 편지를 주고받은 여자. 너무나 소설적이어서 오히려 소설로는 쓸 수 없겠다 싶었던 기사의 무엇이 나를 무모한 시도로 이끌었을까.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어떤 얼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 문장을 기다리는 모니터처럼 텅 빈 얼굴. 존재하지 않아서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 얼굴에 홀린 여름 내내 전율처럼 등줄기를 훑은 한마디. 어느 하늘 아래에서 인 바람이었는지, 혹은 물이나 불이었는지, 자꾸만 늘어지려는 전깃줄을 팽팽히 떨게 만든 한마디. ‘가장 얇은 것 속에 가장 깊은 것이.’

나라가 당신 것이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멋있기보다 위험한 일이다. 문자 그대로 understand는 이해하려는 대상보다 아래에 서보는 일, 이해라는 손톱만큼의 빛을 위해 자신의 대부분을 어둠에 내주어야 하는 작업이기에. 무작정 아래 서다보면 이해는커녕 어둠의 그림자에 묻혀버리기 십상이니. 초승달을 얻으려 얼굴의 대부분이 컴컴해지는 지구별처럼.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는 결국 우리 자신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워 시시각각 모양이 바뀌는 저 달처럼. 발 딛고 있어 대기권 밖으로 나가기 전엔 결코 볼 수 없는 지구별처럼.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민낯이 드러나는 쪽은 가면 아래 숨은 얼굴만이 아니다.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거울이 남기 마련이기에. _‘작가의 말’에서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돌이켜보면 야구 중계 화면 속으로 팔딱팔딱 끌려들던 내 심장은 8번 타자가 헬멧을 집어들기 무섭게 자연 다큐 채널로 바뀐 듯 본래의 박자를 회복하곤 했다. 8번에게 풀 스윙은 언감생심, 번트라도 제대로 대면 감사할 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어떤 마음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일 밀리미터나마 가까워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번이 여덟번째 단편집이라는 우연과는 무관한 생각.

너는 지구에 글 쓰러 오지 않았다

소설에 언급된 외계 존재의 소재를 파악하고 계신 분은 출판사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지구 반대편에서 열흘간 격리된 채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마지막 주의 사항은 불길한 매혹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열리는 국제 도서전. 함께 출국하는 작가들 중 현지 확진으로 귀국 명단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내가 유력했다. 불운에 당첨될 확률이라면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똑같이 우물물을 마신 동네 사람들 중에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은 나뿐이었고, 가족들과 나란히 잠든 방에 연탄가스가 새어들었을 때도 병원 신세를 진 사람은 나 혼자였다. 목적지가 『백년의 고독』의 나라가 아니었다면 3년 만의 국제선 탑승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노트북 대신 두툼한 스프링 노트를 캐리어에 챙겨 넣고 있었다. 최고의 뮤즈는 완전한 고립이다. 억울한 감옥살이에서 탄생한 『돈키호테』, 불시착한 사막에서 물 한 방울 없이 견딘 닷새가 낳은 『어린 왕자』. 근대문학의 효시 『데카메론』은 아예 페스트에 포위된 사람들이 돌아가며 들려주는 이야기 아닌가. 내게도 일생일대의 뮤즈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백년 같은 열흘의 절대 고독 속에서 창작 혼을 불사르게 된다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써야만 할 것 같았다. 귀국 날 아침 PCR 검사 결과 ‘음성’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실망했던가. 실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감사 기도를 드릴 뻔했다. 입국 심사관이 쏟아내는 스페인어 앞에서 머릿속이 새하얘진 순간부터 작가로서의 각오는 반쯤 무너져 있었다. 백두산에 버금가는 고지대라 비말은 더 멀리 날아갔고, 낮밤이 뒤바뀌어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들이켜도 하품은 그칠 줄 몰랐다. 더구나 그곳은 불면증도 전염되는 ‘마콘도’의 땅, 마술적 리얼리즘의 심장부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작가적 본분을 망각한 채 한국에서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더 철저했고, 다시 못 올 절대 고독으로부터 허둥지둥 도망치고 말았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콜롬비아산 커피를 마시며 빈 문서창을 멍하니 바라볼 때마다 탄식처럼 자문하곤 한다. 그날 아침의 결과가 ‘양성’이었다면 어땠을까. 날짜변경선 너머에 두고 온 열흘 속에 머물 수 있었다면. 겁에 질려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스프링 노트에 뭔가를 적어 내려갈 수 있었다면. 커피의 뒷맛처럼 달콤 쌉싸름한 공상은 번번이 지구 반대편 어느 골방에 갇혀 인생 작품을 완성하는 유니버스 입구에서 막힌다. 가정법의 결론이 궁금하다면 열여덟번째 ‘작가의 말’을 쓰고 있는 이 유니버스에서도 계속 작가로 남아야 한다. 마술같이 차원의 문이 열려 제목조차 모르는 육필 원고를 가져올 날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2022년 8월

동화처럼

사랑 앞에서라면 우리는 진지해진다. 심지어 비장해지기도 한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병사처럼. 농담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농담을 던지지 못한다는 것은 혹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증거가 아닐까? 죽음의 경우처럼.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살아가거나 죽어 가거나 둘 중 하나이듯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하지 않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뿐. 초판을 내고 11년 만에 개정판 교정지를 받아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들여다보고 있자니 정리하기도 그대로 두기도 애매한 오래된 앨범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부끄러움의 크기만큼 아련했고 아련함의 크기만큼 부끄러웠다. 사실 『동화처럼』의 시작점은 4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발표한 단편 「천년여왕」에서 나는 세상에 없는 가상의 소설을 몇 편 지어냈다. 작가가 되려는 주인공이 완전히 새롭다며 짜낸 스토리마다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존재한다는 설정이었으니. 같은 상대와 세 번 결혼하는 비현실적 이야기도 그때 탄생했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누구나 베티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베티를 만날 수 없다. 베티는 애인이면서 창녀이고 삶이면서 죽음이고 희망이면서 절망이고 천사이면서 악마이고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지구이면서 화성이고 찰리 채플린이면서 올리비아핫세고 영웅본색이면서 천국보다 낯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을 견디기 위해 쓰는지. 그럴 때면 끝없이 반복해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가 떠오른다. 소설 쓰기에 ‘마일리지’는 없다. 매번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두 권의 책을 냈든, 120권의 책을 냈든 마찬가지. 이것이야말로 소설 쓰기의 매력이 아닐까.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순간, 겨우 터득한 소설 쓰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 어김없이 작가 지망생으로 돌아간다는 것.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막막하기 때문에 또다시 쓰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언제나 첫 소설, 첫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 열세번째 책이다. 아니, 열세번째 ‘첫’ 책이다.

야구란 무엇인가

야구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밥이고 누군가에게는 법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이고 누군가에게는 물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이고 누군가에게는 한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집이고 누군가에게는 길일 수 있다. 여기 집을 떠나 낯선 길 위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고 아들에게는 해서는 안 될 일이 많다. 아버지의 품에는 칼이 아들의 품에는 나침반이 있다. 칼을 품은 아버지와 나침반을 품은 아들이 함께 야구를 본다. 칼을 품은 아버지에게 야구란 무엇이고 나침반을 품은 아들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그리하여 당신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은 야구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위험한 독서

이번에는 당신이 읽을 차례야. 나를 읽어봐.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책이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있으니까.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위험해지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평안하고 또 평안한 수만 번의 아침저녁이여 안녕.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작가의 말’에서)

장국영이 죽었다고?

지나간 문장을 돌보고 매만지는 것은 언제나 난감한 일입니다. 한물간 농담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난감합니다. 한번 지나간 문장은 제아무리 기름칠을 하고 조이고 닦아도 다만 지나간 문장일 뿐이어서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지나간 문장이 안쓰럽다면 다가갈 문장은 아득합니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첫사랑의 근황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이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이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민은 지나간 문장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이고 사랑은 다가갈 문장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가갈 문장의 아득함에 대한 사랑으로 지나간 문장의 안쓰러움에 대한 연민을 베어낼 것입니다. 베어내면서 조금씩 나아 가겠습니다.

천국의 문

독자가 떠나간다고,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독자가 없다면 아무도 쓸 수 없게 되겠지요. 소설은 ‘혼잣말’이 아니니까요. 누군가에게 건네는 눈짓이며 손짓이니까요. 독자들의 사정이야 제 아둔한 머리로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끝까지 독자로 남아서 읽겠습니다. 작년 봄 아버지의 마지막 심장 박동을, 차가워지는 손목에서 뛰던 최후의 온기를 읽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바라기만 하고 끝내 못한 말이 새삼 사무칩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 괜찮아요.” ‘떨림’이라는 부끄러움을 죽비처럼 내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글쓰기라는 고독한 항해에 등불이 되어주는 작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천년의 왕국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내면을 상상해야 햇다. 내면을 복원할 수 있다면 수수께끼와 같은 동방의 왕국을 바라보는 이방의 시선은 자연스레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역사가 돌보지 않은 이방인의 내면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것은 애당초 가당찮은 일이었다. 복원할 수 없다면 창조해야 했다. 380년 전 이 땅에 난파한 이방인의 내면을 상상하던 내내 나는 내 안의 카오스를 응시해야 했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카오스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니체였다. 소설을 탈고한 지 한 게절이 지난 여태 카오스의 결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독일 철학자의 말이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머리 위에서 춤추는 별보다 내 안의 카오스가 더 소중하다. 자살로써 혼돈의 생을 마감했던 일본 작가는 자식보다 부도가 더 귀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우주의 춤추는 모든 별은 자신을 낳은 카오스를 노래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안의 카오스를 노래하라. 나는 내 안의 카오스를 노래할 것이니. 별은 추 춰도 상관없고 춤추지 않아도 무방하다. 두려움 없이 노래하라. 그것으로 족하다.

황금사과

나는 눈앞에 펼쳐진 텍스트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찍이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중세까지 가게 되었다. 참 멀리까지 가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답을 구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바스커빌 사람 윌리엄이 들려주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얻었을 뿐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야기로부터는 그 어떤 답도 구할 수 없다.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질문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질문은 또다른 질문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다른 텍스트를 향해 빠끔히 열려 있는 저 텍스트의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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