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는 왔다가 간다.
이번 시집을 만든 지난 3년여는 <유마경>을 읽고가 아니라,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엮은 기간이었다. 자아를 긍정해서 자아를 긍정하는 타인을 만나는 선(禪). 타인을 긍정해서 자아를 비우는 <유마경>. 이 속사정은 내가 때늦게 유마를 만났기 때문에 체득하게 된 것이다. '때늦게'가 아니었다면 저 무한 반복의 <유마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제 '유마의 병상(病床)'을 떠난다. 혹시 다음 시집은 예컨대 지금 읽다 던지고 읽다 던지곤 하는 들뢰즈를 제대로 읽도록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되지나 않을지.
이상하다.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어도 상상력은 시에서도 산문에서도 줄지 않고 더 끓고 있음을 느낀다. 이 일이 기쁨의 샘도 되고 괴로움의 물줄기도 되었다. 줄어드는 기억력 때문에 정말 조그만 것을 잊혀지기 전에 써놓느라 잠에서 깨어 몇 줄 끼적이고는 다시 잠들지 못하거나 맨 술의 힘으로 간신히 잠을 이어간 날을 어디 최근에만도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으랴.
손볼수록 시는 길이가 줄어들고, 손볼수록 산문은 부피가 는다. 산문 손보기는 화분에 물을 주다가 아 이 문주란이, 아 이 제라늄이 그동안 이렇게 컸나, 놀라는 느낌과 비슷하다. 화분을 간다면 모를까 더 커지면 곤란한데. 더 이상 묽어지지 않도록 위스키 잔에 얼음을 더 넣지 않기로 한 때처럼, 더 이상 부피를 늘리지 않으려고 애쓴 산문도 꽤 있다. 시인의 숙명이다. ('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