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멜로디는 그렇게 종종 긴 세월을 통과하여 내가 서 있는 곳으로 흘러들어오곤 했다. <빛의 호위>(2017) 9쪽
2017년 표제작 <빛의 호위>를 중심으로 소설집을 엮으며 조해진은 작가의 말에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적었다. 조해진의 소설이 만들어온 단단하고 귀한 세계를 꾸준히 따라 읽어온 독자들이 각별히 아낀 두 인물, 권은과 승준의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만난다. 조해진이 5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빛의 호위>에서 세계가 잊어버린 아이였던 권은은 승준에게 선물받은 카메라를 통해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시간이 흘러 권은은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승준은 기자가 되었다. 시리아 내전을 촬영하던 권은은 왼쪽 다리를 잃게 되고, 이제 막 한 아이를 기르게 된 승준은 권은의 사정과 취재로 알게 된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의 사정에 연루되며 사람들의 삶을 향해 손을 뻗는다.
김효선 MD (2024.09.06)
이옥선.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그녀의 딸인 김하나 작가의 육아 일기를 책으로 엮은 <빅토리 노트>의 공저자였던 2022년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세세하게 사랑한 기록이 있다는 부러움 반, 대단한 분이 나타났다는 기대감 반으로 그녀의 첫 책을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2년 후, 그녀는 드디어 단독 저자로 돌아왔다. 아주 화려하게, 다소 매운맛으로. <빅토리 노트> 이후 책을 다시 낼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 새 글을 쓴다는 것이 '나이깨나 먹은 나에게 부담을 주는 숙제를 떠안는 꼴'이라고 여겨 '책을 다시 내다니 안 될 말이라고 다짐'했는데 쓰다 보니 글이 술술 풀려 '한입으로 두말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고 변명'하는 이옥선 작가는 이 책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한 노년의, 대부분은 즐겁고 종종 헛헛하고 꽤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마 모두에게 두려운 일일 것이다.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미래, 그 미래를 먼저 맛 본 인생의 선배가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늙음이란 꽤 괜찮은 것이라고. 당당하고 호쾌하고 명랑하고 즐거운 책이다.
도란 MD (2024.09.03)
군마 현경 수사1과 가쓰라 경부는 당연하겠지만 경찰이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탐정도 아니고, 전설적인 명탐정을 할아버지로 둔 고교생도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수사본부가 꾸려지면 그 자신을 포함하여 가용 인력을 동원해 탐문과 조사, 신문, 검증을 거쳐 사건의 진실로 접근한다. 유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 그가 별안간 번뜩이는 순간이 있다면, 진실에 가 닿을 마지막 한 걸음을 혼자 훌쩍 뛰어넘을 때이다.
일본 주요 미스터리 랭킹에서 3관왕을 달성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미스터리. 책 속에서 가쓰라 경부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어둠의 조직이나 광기 어린 사이비 종교 집단의 비밀을 파헤치지는 않는다. 다만 사건과 수수께끼가 있으며,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단서가 모이고, 이를 반복 검증하여 진실을 밝혀낼 뿐이다. 그를 쫓아 진실에 함께 닿을 수 있는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미스터리는 독자가 풀려고 마음먹고, 구석구석까지 쫓으면 진상에 이를 수 있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이 바로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작가가 던지는 공정한 도전이자, 좋은 질문일 것이다.
박동명 MD (2024.09.06)
지루함에 압도당한 ‘나’는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로 계속해서 차를 몰다가 바큇자국이 점점 깊이 파이는 숲길로 접어들어서야 어느 순간 차가 길바닥에 처박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를 돌릴 수도, 후진으로 빠져나올 수도 없다. 도움을 청할만한 곳도 없고, 하늘에선 눈이 내린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숲속으로 걸어간다. 피로와 추위, 배고픔이 엄습하는 가운데 ‘나’의 눈앞에 무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저것은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것이 사람일 리가 없다. 밝은 빛을 내뿜는 순백색의 형체가 나’에게 다가온다. 과연 지금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20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욘 포세의 최신작. 작가 데뷔 40주년인 2023년 발표한 소설로, 80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본문 속에서 의식 그 자체처럼 흘러가는 물음표 없는 질문들로 작가가 오래도록 천착해 온 삶과 죽음의 문제, 그 문턱에 놓인 한 인간의 내면과 기이한 체험을 묘사한다. 스웨덴 아카데미 노벨재단의 동의를 구해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을 함께 실었다.
박동명 MD (2024.03.15)
2024년 3월 17일을 마지막으로 23년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은 SBS 파워 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주옥같은 오프닝 멘트를 모아 놓은 책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가 출간되었다. 매일 아침 9시, 다정하고도 조금은 무심한 톤으로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김창완 '아저씨' 덕분에 많은 이들이 고단한 세상 살이를 위로받고 또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이 얻곤 했다.
그와 애청자들이 함께 그려왔던 이야기는 아쉽게도 막을 내렸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창작자로서, 배우로서,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아직도 힘든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준 따스하고도 담백한 말들은 이제는 책 속 문장이 되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가장 김창완다운, 아날로그 감성의 위로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그의 선물이다.
도란 MD (2024.03.29)
나를 펼쳐주세요 나는 줄줄 흐르고 싶어요 강이 될래요 바다가 될래요 마그마가 될래요....
<독서 유예> 24쪽
2020년 <침착하게 사랑하기> 외 4편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차도하의 첫 시집. <침착하게 사랑하기>는 신에게 손을 붙잡혀 강변을 걷는 화자가 맡은 물비린내로 시작되어 마지막 행의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마무리된다.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는 평처럼 이 시의 비범함을 감각한 많은 이가 그의 첫 시집을 기다렸다. 그때 독자의 '미래의 손'엔 이 시집이 쥐어진 듯도 했다.
'천국은 외국이다.' (<입국 심사>)로 열린 시집은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로 닫힌다. 내가 죽고 나서도 나는 돌을 던질 것이다.'(<돌 던지기> 부분)라고 적은 시인의 옆에 서서 그의 시를 사랑한 이들도 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김효선 MD (2024.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