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수급자', '차상위계층' 등 물질적 결핍에 대한 차가운 기준에 익숙한 한국의 시민들은 '빈곤'의 계량화가 간단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회/정치적으로 합의된 빈곤의 기준은 없다. 빈곤 개념은 사회마다, 학자마다 사뭇 다르게 사용되며 그렇기에 국가별 빈곤대책도 천차만별이다. 오랫동안 빈곤의 지형을 탐구해온 인류학자 조문영은 빈곤을 '과정'으로 본다.
과정이라는 말은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흐릿한 경계. 가진 자본이나 수입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은 빈곤을 불안해하는 동시에 그 실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혼란한 사회적 인식 속에서 조문영은 빈곤에 대해 단정적으로 정의 내리길 거부하고 개념의 외연을 확장해나간다. 개별적 빈곤 서사, 그리고 그 서사를 이용한 국가 통치, 빈곤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글로벌 빈곤의 세계를 대하는 청년들의 실존 빈곤으로 확장되고, 이어 비인간을 착취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논의까지 뻗어간다.
빈곤이 곧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 속에서 취약한 존재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분전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지구상의 누구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빈곤에 맞선 비판, 저항과 함께(同) 머무르며 살아가는(居) 감각과 의식을 키울 수밖에. 빈곤 연구 20년, 조문영이 오래 숙성시켜 내놓은 이 책은 빈곤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