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2.42020
  •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은이), 민승남 (옮긴이) | 문학동네 | 2020년 2월 "아룬다티 로이,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처음 쓴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아룬다티 로이. 이후 모국 인도의 계급 차별에서 미국의 제국주의까지 다양한 주제로 비평서와 칼럼을 발표하며 사회운동가로서 목소리를 내왔다. 집필에만 10년이 걸린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에는 그가 수십년간 목격하고, 고민하고, 이야기해온 광경들이 응축되어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유일한 윤리적 행위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쓰고, 행동하고, 노래하는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서히 모든 사람이 되어서. 아니. 서서히 모든 것이 되어서." 소설의 첫 번째 조각은 여성이면서 남성인 '안줌'의 이야기다. 그를 남성으로 키우려 하는 가족을 떠나, 제3의 성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로 향한 안줌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소설의 또 다른 조각들은 대학에서 함께 연극을 하던 네 친구의 삶이다. 이들의 사랑과 우정은 인도 현대사라는 참혹한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고, 안줌의 길과 맞닿는다. 종교, 계급, 파벌…극심한 이분법과 대립으로 불신과 죽음이 만연한 일상. 비극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역설적이리만치 아름답다.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라는 헌사로 시작해, 증오와 폭력이 남긴 깊은 상처들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소설.

  •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은이) | 어크로스 | 2020년 1월 "김원영 변호사 추천! 홍승은의 글쓰기 수업"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강요도, 당위도 아닌 부드러운 바람이다.

    "글쓰기 수업"이란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이 책은 글쓰기 테크닉을 알려주진 않는다. 그보단 저자 홍승은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글쓰기를 시작한 뒤 그것이 삶을 어떻게 치유했는지,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이 글쓰기를 하며 어떤 변화를 마주했는지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삶을 쓰다듬고 스스로를 용서한다. 그 거대한 변화를 직접 겪고, 또 보아온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살며시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도 글을 써보면 좋겠다고.

    내 아픔을 깊숙이 들여다본 사람은 남의 고통에도 민감해지기 마련이다. 나를 돌보는 글쓰기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글 쓰는 자의 태도에까지 나아간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착취하지 않고, 약자와 자신을 편리하게 동일시하지 않는 글쓰기를 저자는 계속해서 시도한다. 의도치 않은 폭력을 저지를세라 유리 위를 살금살금 걷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당신이 쓰게 될 글도 그런 무해한 힘을 가지면 좋겠다.

  •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메리 매콜리프 (지은이), 최애리 (옮긴이) | 현암사 | 2020년 1월 "<예술가들의 파리> 3부작 출간"

    이 책의 초반부 중 일부를 영상화한다면 대략 이런 식일 것이다. 풀샷. 코뮌 진압 이후, 폐허가 된 파리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클로즈업. 카메라는 마네의 일상을 좇는다. 마네는 초라한 집에서 편지를 읽고 있다. 마네의 팔을 따라가던 앵글은 편지에서 멈춘다. 발신자는 모네. 돈을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화면이 전환되면 카메라는 이제 쓰러질 듯 가난한 모네를 따라간다. 화면의 분위기는 조금 어둡고 휑하겠지만, 동시에 어떤 반짝임도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이 무너져내렸지만 또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한 시기였으니까. 그 반짝임은 점점 빛을 더해 찬란한 새 시대를 열 것이었다.

    예술적 생명력이 폭발하던 시대, 파리의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시리즈 도서 3권이 출간됐다. 1871년, 코뮌 봉기가 끝난 직후부터 1929년까지 연도 순으로 서술된 이 책엔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드뷔시, 피카소, 헤밍웨이 등 우리가 사랑한 여러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개별의 삶과 여러 관계들로 각 해마다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엮인 지점마다 자연스럽게 교차되어 전개되며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살아본 적 없는 시대에 대한 아련함과 그리움이 물씬 올라온다.

  • 파워북 : 누가, 왜, 어떻게 힘을 가졌을까?
    클레어 손더스, 헤이즐 송허스트, 조지아 앰슨-브래드쇼, 미나 살라미, 믹 스칼렛 (지은이), 조엘 아벨리노, 데이비드 브로드벤트 (그림), 노지양 (옮긴이), 록산 게이, 은유 (추천) | 천개의바람 | 2020년 1월 "록산 게이, 은유 추천! 더 멋진 세상을 만드는 힘"

    힘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있을까? 집, 학교, 운동장, 어디에나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두가 같은 힘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힘’을 주제로 한 여러 이야기와 질문을 담은 책이다.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 문제부터 잘못된 힘의 규칙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까지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힘뿐만 아니라, 자존감, 용기, 지식 등 내 안에 있는 힘 역시 결코 작지 않음을 함께 이야기한다. 이런 힘들이 모여 세상을 움직여 온 역사들을 되짚어 본다면 나와 우리를 지켜야 할 때 보다 힘차게 맞설 수 있지 않을까.

    힘은 어디에든 있지만, '더 멋진 세상을 만들어 나갈 힘'은 지금 우리 손에 있음이 분명하다. 내가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자. 힘에 대해 알아갈수록, 시선이 닿지 못했던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2.72020
  • 글로벌 그린 뉴딜
    제러미 리프킨 (지은이), 안진환 (옮긴이) | 민음사 | 2020년 1월 "제러미 리프킨 신작! 지구 생명체를 구하기 위한 경제 계획"

    애플과 구글의 데이터 센터는 100%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다. 페이스북도 새로 짓는 데이터 센터에서 모두 재생 에너지를 활용할 것이라 선언했다. 이들이 재생 에너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위기 상황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할 지경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처할 상황은 아주 낯설다. 현재 지구의 평균 기온보다 섭씨 0.5도가 더 오르면 지구의 생명체는 모두 멸종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선 온난화의 주범인 가스 배출량을 2010년 수준에서 45%로 줄여야 한다. 화석 연료의 사용을 절반에 가깝게 줄이는 것이 생존을 위한 유일하고 긴급한 대안이 된 시대,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세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이 시대에 맞는 경제 계획, '글로벌 그린 뉴딜'을 제안한다. 연료의 변화는 산업의 전방위적 변화를 수반한다. 전 지구적인 이 산업 혁명을 위해 제러미 리프킨이 강조하는 것은 '인프라의 구축'이다. 그는 운영 방식, 커뮤니케이션 방식, 지역 사회의 경제, 사회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설계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눈에 띄는 점은 이 변화를 이끌어나갈 주인공을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로 꼽은 것이다. 이전 세대가 만든 문제에 대한 버거운 책임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 상황에 대한 더 큰 자각도, 변화의 바람을 이끌 에너지도 이미 젊은 세대에게 있는 것 같다. 기성세대가 할 일은 최대한의 지지일 것이다.

  • 멀티팩터
    김영준 (지은이) | 스마트북스 | 2020년 2월 "성공을 멀리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건 달콤한 성공 스토리다. 그것은 마치 보물지도를 손에 넣은 듯 우리를 설레게 한다. 이미 성공한 기분으로, 길을 나서기만 하면 될 터다. 그러나 지도가 안내한 그곳에 보물은 보이지 않는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공한 기업들의 사례를 연구하고 벤치마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결과는 좋지 않다. 스타벅스의 국내 성공을 모방한 많은 커피 프랜차이즈가 사업을 접거나 축소했다. 애초에 그 복잡다단한 성공의 여정을 몇 개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 아니었을까?

    전작 <골목의 전쟁>에서 날카로운 마켓 인사이트를 전했던 저자는 말한다. 그 미사여구 가득한 성공 스토리에 속지 말라고. 물론, 성공의 비결을 알아가려는 노력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성공은 실력과 노력, 운과 그 외의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며, 여러 오류와 후광효과를 걸러 낸 성공의 복합적 요인들을 두루 살펴본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는 자신만의 강점을 발견하고 확장시켜 우위를 선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타인의 성공은 잠시 멀리하기로 하자. 이제 우리 스스로의 이야기를 쓸 시간이다.

  • 오민혁 단편선 화점
    오민혁 (지은이) | 거북이북스 | 2020년 2월 "이토록 짧은 만화, 이토록 긴 여운"

    지난 1월 알라딘 북펀드를 통해 이미 입소문을 탄 도서 <오민혁 단편선 화점>이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북펀드는 목표 금액을 훨씬 상회하여 700만 원을 돌파했다.) '오민혁 단편선'은 2015년 11월부터 2016년 1월까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됐던 총 5편의 만화로 연재 당시부터 이미 '명작'으로 탄탄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던 작품이다. 단행본으로 선보이는 <오민혁 단편선 화점>은 웹툰에서는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단편 '우주어'를 추가하여 총 6편의 짧지만 강렬한 작품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었다. 밀도 높은 구성과 연출에 넋을 놓고 읽다가 결국 허를 찌르는 결말에 도달할 때면 단편 만화의 매력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눈 밝은 알라딘 독자들이 미리 알아본 화제의 도서, 이제는 당신이 그 전율을 느낄 차례다.

  • [세트] 친절한 대학의 다시 배우는 영어 교실 1~2 세트 - 전2권
    이상현 (지은이) | 길벗이지톡 | 2019년 12월 "영어가 안 되니 패키지여행을 갈 수 밖에 없어요.”

    구독자 수 23만을 돌파한 이지 쌤 채널의 구독자 중 80%가 50대 이상이다. 모든 영상은 철저하게 초급 영어학습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되고 교재의 글자 크기도 큼직하다. 이제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닌 배움의 설렘과 즐거움을 찾고 싶은 부모님 세대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또, 영어를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 할지 몰라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영어 초급자 모두를 위한 책이다.

2.112020
  •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지은이) | 문학동네 | 2020년 2월 "'모르는 영역'으로 감히 내딛는 그 한 발"

    "왜 아침달 낮달 저녁달이 아니고 모두 낮달인가 생각하다, 해 뜨고 뜬 달은 죄다 낮달인 게지, 해는 늘 낮달만 만나고. 그러니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 <모르는 영역> 속 명덕은 생각한다. 고깃값을 흥정하며 "그렇게는 안 되지."라고 말하는 식당 주인에게 "왜 안 돼요?"라고 되묻는 딸 다영의 마음을 명덕은 알지 못한다. 딸은 도무지 좋게좋게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 해도 됩니까, 한 번은?" 다영의 이 날 선 질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 '모르는 영역'을 향해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선 누구에게나 익숙한 '지금'을 정확하게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권여선의 소설은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김애란의 추천의 글 속 문장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감정을 정확하게 바라볼 용기를 권한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2019년 출간된 권여선의 장편 <레몬>은 이 제목으로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소설은 끊임없이 이 구문을 되뇌게 한다. 50년을 함께한 레즈비언 커플 데런과 디엔의 이야기. 식당을 찾아 헤매던 중 '공기중에 퍼져있는 미세먼지처럼 어찌해볼 수 없는 재앙'을 예감하고 으르렁대고 마는, 조절할 수 없는 데런의 분노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는지. (<희박한 마음>), 언니의 이름으로 빚을 만들고 도망친 엄마와 똑같은 방식으로 소희의 이름으로 빚을 만들고 도망친 언니. 매달 백칠십만원을 받고 스포츠매장에서 근무하는 소희가 빚 없는 사람이 되려면 식비를 얼마나 아껴야 하고, 손톱 치료를 얼마나 미루어야 할지.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소희도 사람이기 때문에' 상하는 마음은 어찌해야 하는지. (<손톱>) 사람의 마음, 사회의 구조, 운명과 섭리. 그 어디쯤의 '모르는 영역'에 대해 생각해 본다. 권여선의 소설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감정들에 대해 굳이 색을 칠해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정확함으로 묘사하는 슬픔의 풍경들이 선명해서 오히려 위로가 된다. 취기 후의 너그러움 같은 감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바라본다. 이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소설, <전갱이의 맛>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점멸하는 동안은 살아 있다. 지금은 그 모호한 뜻만으로 충분하다."

  • 작은 아씨들 (영화 공식 원작 소설·오리지널 커버)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은이), 강미경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우리의 인생은 모두가 한 편의 소설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 속 ‘조의 책’을 재현한 1868년 초판본 표지 특별판. 소설 내용에 해당하는 영상 스틸컷 33장이 수록되어 영화 속 장면을 되짚어 음미할 수 있다. 거윅 감독은 30대에 다시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소설이 현재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조'가 늘 자신과 함께 있었으며 "이 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30년을 기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영화는 소설의 구조와는 달리, 성인이 된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유년 시절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늘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작은 아씨들>에서는 유년기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알려주는 그런 반짝이는 힘이 느껴진다. 거윅 감독을 비롯해 시몬 드 보부아르, 줌파 라히리, 조이스 캐롤 오츠, 조앤 K. 롤링 등 수많은 이들이 <작은 아씨들>을 '나를 만든 책'으로 꼽으며 사랑한 이유도 그러할 것이리라. 서로 다른 꿈을 꾸지만 각자의 꿈을 존중하고, 서로의 힘이 되어주며 함께 성장하는 네 자매의 사연이 150년을 뛰어넘어 여전히 현재의 이야기로 읽힌다.

  • 착취도시, 서울
    이혜미 (지은이) | 글항아리 | 2020년 2월 "누가 기생하는가"

    영화 '기생충'에서 동익(이선균 분)은 가난을 냄새로 식별한다. 쿰쿰한 반지하의 냄새. 그는 자주 코를 막는다. 현실 세계의 누군가는 가난에서 곰팡이 냄새 대신 돈 냄새를 맡았다. 영화보다 지독한 현실에서 그 누군가는 빈민의 돈을 좇는다.

    서울 쪽방의 한 평당 평균 임대료는 18만 원이 넘는다. 강남의 아파트들 중에서도 이 정도 고가는 찾기 어렵다. 난방도 에어컨도 없는 1-2평 남짓한 비루한 방의 월세는 현금으로 돈다. 이 돈들이 모이면 꼬리표 없는 목돈이 된다. 윤리와 상식 바깥의 일이라 범인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어렵지만 실제로 이 돈을 챙겨 제 배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창신동 쪽방촌의 건물 8채는 한 가계의 가족 사업이다. 매월 챙기는 현금 월세만 1400만 원 이상이다. 서울 쪽방촌의 실 소유주들 중 강남 3구에 현주소를 둔 소유주는 25명이나 된다.

    이 실태를 처음 취재하고 보도한 저자는 이 문제를 '빈곤 비즈니스'로 분류했다. 공산주의조차 상품화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 또한 예외는 아니다. 빈곤 비즈니스의 큰 문제는 쪽방촌에 한번 들어온 사람들이 이곳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쪽방촌 건물주들은 재개발과 지자체의 복지를 막는다. 빈자들이 계속 쪽방촌에 차 있어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쪽방촌의 주민은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이 단 두 가지라고 말한다. 죽거나 노숙인이 되는 것. 숙주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피를 빠는 기생충이 생각난다.

  • 울트라러닝, 세계 0.1%가 지식을 얻는 비밀
    스콧 영 (지은이), 이한이 (옮긴이) | 비즈니스북스 | 2020년 2월 "극한의 효율성으로 시간을 지배하라!"

    시간이 없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고질병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 외국어 능력이 시급한 여행자, 빠르게 변하는 기술을 따라잡아야 하는 직장인 등 단기간에 무언가를 마스터하고 싶은 이들은 초조함에 쉽게 지배당한다. 그렇다고 온종일 공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튜브 영상 보듯 2배속 재생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 2배속도 아닌 4배속으로 대학의 정규 커리큘럼을 끝냈다는 저자 스콧 영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울트라러닝 프로젝트로 인생을 바꿨다는 그는 이 책에서 빠르고 강도 높은 아홉 단계의 지식 습득법을 소개한다.

    울트라러닝, <열정의 배신> 칼 뉴포트가 처음 사용했다는 이 용어를 저자는 '지식과 기술을 얻기 위해 스스로 설계한 고강도 학습 전략'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라는 단어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울트라러닝의 핵심이 자발성이기 때문인데,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는 저자는 한국 학생들의 엄청난 학습 시간에 놀랐다 말하지만 동시에 그 공부가 과연 효율적인가에 대한 의문도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효율성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 공평하지만 상대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강도를 높여 몰입함으로써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 이 극한의 훈련법은 MIT 4년 과정을 1년 만에 끝냈다는 저자나, 3개월마다 1개의 외국어를 마스터했다는 책 속 사례의 주인공처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게 필요한 기술을 효율적이고 유효하게 습득하는 능력은 학생들은 물론 바쁜 직장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말한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단지 하지 않을 뿐이라고. 이제 대범하게, 생각을 실행하는 일에 나서자. 그것이 아마도 울트라러닝의 0번째 법칙일 것이다.

2.142020
  • 양준일 MAYBE
    양준일, 아이스크림 (지은이) | 모비딕북스 | 2020년 2월 "가수 양준일이 전하는 진심"

    대한민국 가요계에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라진 가수, 일명 '슈가맨'을 찾아 나서는 프로그램 '슈가맨 3'로 팬들 앞에 소환된 양준일. 그가 생애 첫 책 <양준일 MAYBE>를 펴내며 세상과 본격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시간 위를 걷듯 인생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시간여행자'가 아닌, '라이프 워커(Life Walker)'로 불리길 원한다는 그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의 어둠과 빛, 희망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준다.

    외로움, 경험, 배움, 미움, 꿈, 행복, 가난, 겸손, 편견, 자존감, 불안, 결혼, 사랑, 아내, 타잔(아이). 그의 삶을 이루는 키워드로 과거와 현재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남편이자 아빠로서, 가수로서, 그리고 진실된 한 사람으로서 살아온 '양준일의 시간'이 담겨 있는 이 책은 어느 장을 펼쳐 읽든 양준일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힘겨운 현실에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아마도(maybe) 이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삶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하는 힘을 품은 'MAYBE'에 자신의 삶의 고백과 함께 희망을 담아 건넨다.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 (지은이) | 교양인 | 2020년 2월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1, 2권 동시 출간"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가 총 5권으로 나올 예정이다. 이 중 1, 2권이 동시 출간되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한겨레'에 5년간 매주 연재했던 글을 모았다. 그 글들을 프린트해서 가지고 다니거나 파일로 저장해둔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손에 잡히는 물성으로 만나고 싶었을 이들에겐 크게 반가운 소식이다.

    1권의 제목은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그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기 위해선 내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악의가 없어도 나쁠 수 있다. 나태한 생각, 안이한 자기 위치 설정... 나쁨으로 가는 길은 항상 열려있고 순식간에 당도한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버티고 싸운 글들이 여기에 있다. 깊은 사유 끝에 확신을 가진 단호한 문체는 정희진의 트레이드 마크다. 밀도 높은 문장들은 천천히 곱씹어야 소화가 된다.

  •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은이), 윤미연 (옮긴이) | 문학동네 | 2020년 1월 "책으로 맺어진 우정, 함께 읽는 기쁨"

    책방을 운영하며 평생 문학을 사랑해온 피키에 할아버지. 파킨슨병과 녹내장으로 책을 펼칠 수 없게 되자, 3만권의 장서 중 가장 아끼는 3천권과 함께 노인요양원으로 들어왔다. 온통 책으로 뒤덮인 그의 방을 보고 요양원 신입직원 그레구아르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과 담을 쌓고 살아온 그에게 피키에의 책 사랑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단지 힘든 주방 일을 피하기 위해 매주 한 시간씩 할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한 그레구아르. 그 첫 번째 책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이 소년은 바로 나다. (…) 타인의 삶을 그렇게 체화해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래에 직면하게 될 때의 그 불안. 홀든의 두려움은 바로 나의 두려움이 된다."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서 그레구아르는 새로운 충격에 휩싸인다. 학교와 시험에 적응하지 못했고, 나무를 좋아했지만 나무와 상관 없는 일을 하는 자신과 소설 속 홀든의 삶이 겹쳐져 그의 공허감을 그대로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낭독회'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책을 읽어달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우울했던 요양원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져 간다.

    실제 프랑스 전역을 돌며 책을 낭독하는 일을 하는 작가 마르크 로제의 경험이 스민 소설이다. 나이, 성격, 관심사... 어떤 공통점도 없었던 두 사람이 책을 통해 가까워지고 가장 깊은 속내를 나누게 되기까지.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하는 '책 읽기'에 관한 따뜻한 이야기.

  • 일렉트론 영웅전 1 (책 + 실험키트)
    조영선, 한정욱 (지은이), 김우람 (그림), 조용성 (감수) | 길벗 | 2020년 2월 "직접 실험하며 배우는 코딩 과학 학습만화"

    커넥터, 건전지, LED 등 부품 종족들이 살고 있는 코딩 행성. 하지만 이를 정복하려는 버글버글 행성의 야욕으로 폐허가 되어버리고, 부품 종족들은 코딩 행성을 재건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내기로 한다. 손을 잡은 바로 그 순간, 모두의 몸을 통과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게 되는데…! 과연, 이 에너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코딩의 기본이 되는 전자 과학 상식을 다룬 학습만화로, 실험 키트의 부품들을 직접 연결해보며 작동 원리까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컴퓨터 언어를 익히는 것만이 아니라, '문제 상황에서 보다 넓은 시야로 여러 해결 방안을 찾아내는' 코딩 교육의 의의를 스토리에 잘 녹여냈음은 물론, 재미까지 갖췄다.

    코딩 행성은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까? 다양한 부품 친구들을 만나며 더 새롭고 더 멋진 힘을 만들어 낼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2.182020
  • 먼 바다
    공지영 (지은이) | 해냄 | 2020년 2월 "사랑의 작가, 공지영이 돌아왔다"

    "이렇게 단순한 것, 이렇게 쉬운 것을 복잡하게라도 설명할 수 없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아파했던 젊은 날이라니."(134쪽) 공지영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40년 만에 첫사랑을 재회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다. 독문학과 교수인 미호는 심포지엄 참석을 위해 마이애미로 간다. 지금 뉴욕에 살고 있다는 자신의 첫사랑 '요셉'과도 만날 계획을 세웠다. 열일곱 여고생 미호와 신학생 요셉의 이야기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이후 미호의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으며 많은 첫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끝이 선명하지 않게 멈추게 된다. 서로의 기억이 엇갈리고, 질문은 자꾸 맴돈다.

    평생 가슴속에 간직해왔을 질문에 대한 답을 40년이 지나 비로소 구하는 이들. 소설은 릴케의 사랑, 나희덕의 식물적인 희구, 광야를 떠도는 유대인의 망각의 시간 등의 관념을 오가며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를 끝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과정을 깊이 사색한다. "내가 여기서 내 마음을 다해 보내는 위로와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우주의 한 비밀을" 이라고 말하며 작가 공지영이 사랑을 담아 전한다.

  • 조지 오웰
    피에르 크리스탱 (지은이),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그림), 최정수 (옮긴이) | 마농지 | 2020년 2월 "영원한 자유인의 입체적 초상"

    알라딘 독자 북펀드 500% 달성! 많은 독자들이 응원하며 기다린 조지 오웰 70주기 기념 그래픽 전기가 드디어 발간됐다. 억압에 저항한 자유인, 사유와 행동을 일치시킨 지성인.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만큼 그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많다. 이 책은 그에 대한 낯선 발견이라기보단 새로운 방식의 이해다.

    만화의 형식은 그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다층적 이해를 돕는다. 조지 오웰의 저작을 섭렵한 글 작가 피에르 크리스탱은 조지 오웰이 겪은 상황과 그의 내면을 넘나들며 그의 삶과 사상을 꿰뚫고,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외 거장 그림 작가들은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이야기에 생생함을 불어넣는다. 그래픽 전기인 만큼 빠짐없이 빼곡한 정보를 담진 않았으나 조지 오웰의 삶을 엿보며 그의 작품들이 탄생한 배경에 대한 감을 잡기엔 충분하다.

    덧) 만듦새가 좋은 책이다. 큰 판형으로 눈이 시원하고, 두꺼운 종이 재질은 페이지를 넘기는 데 즐거움을 더한다.

  • 언락 UNLOCK
    조 볼러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 다산북스 | 2020년 2월 "재능보다 노력, 노력보다는 마음!"

    재능 신화는 그 자체로 드라마틱해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이정후를 보면 그들에게 재능을 물려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이종범을 떠올리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보면 IQ를 궁금해하고 머리가 좋다는 칭찬부터 한다. 세상에 그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다니.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한다. 동시에 그 재능 신화에 가로막혀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하고 잠재력을 폭발시킬 기회를 잃는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기엔 아직 이르다. 우리는 노력이 재능을 이긴다는 사실을 앤절라 더크워스의 <그릿>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지 않은가.

    마인드셋 연구의 권위자인 스탠퍼드대 조 볼러 교수는 이 책에서 뇌과학적 접근으로 그 신화를 무너뜨린다. <그릿>이 열정과 끈기에 주목했다면 그녀는 생각과 마음에 포커스를 맞춘다. 노력보다도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또 학습에 대한 두려움은 뇌 영역의 활동을 가로막고 빠른 포기를 낳는다 말하며, 갇혀 있던 우리의 잠재력을 해방시켜 줄 여섯 가지 법칙을 소개한다. 이제 재능의 대물림 따위는 잊고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자. 누구나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말은 뻔한 응원 같지만 명백한 사실이니까.

  • 내가 왔다
    방주현 (지은이), 난다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2월 "방주현 동시 × '어쿠스틱 라이프' 난다 일러스트"

    이 동시집에서는 배경처럼 숨어있던 존재들까지 모두 주인공이 된다. '세수를 하고 나서 씻겨 준 비누', '나무를 팰 때 밑에 받쳐 놓는 나무토막'처럼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이 "내가 왔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이들을 유심히 살피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모든 시어, 모든 행간에 가득 묻어있다.

    주인공들은 '네 얼굴이 남은 내 마음을 똑똑 깎아내는' 때에도, '가끔 그 애가 울어서 나까지 눈물이 날' 때에도, 이 감정들을 온전히 마주하고 힘차게 뚫고 나간다. 나를 바라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용감해질 수 있으니까. <어쿠스틱 라이프> 난다 작가의 일러스트는 이 용감한 마음들을 개나리빛으로 물들인다.

2.212020
  • 레이 달리오의 금융 위기 템플릿 - 전3권
    레이 달리오 (지은이), 송이루, 이종호, 임경은 (옮긴이) | 한빛비즈 | 2020년 2월 "위기 공략을 위한 완벽 가이드북"

    경제 위기는 어디쯤 오고 있는가? 세계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세계적 석학이든 투자자이든 그 누구도 정확한 시기를 예측할 수는 없다.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오며 대체적으로 일정한 사이클을 보인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에 불과할지 모른다. 대신 우리는 간접 경험을 통해 위기 전후의 양상을 예상해 볼 수는 있겠다. 위기의 징후들을 포착하고, 위기 후에 벌어질 일들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글로벌 투자의 거장인 레이 달리오가 금융 위기 템플릿이라는 거창한 자료를 내놓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레이 달리오는 세계적 투자자로서의 성공 요인을 실패에 대한 준비에서 찾는다. 사이클이 형성되는 경제적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위기 관리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 사이 발생한 48개의 부채 위기를 상세히 연구하고 해당 국면에서의 투자 시뮬레이션을 통해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는 그에게는 정말로 위기가 곧 기회였던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책을 펼쳐 든 순간, 그의 통찰이 차트의 유사함으로 짐작하는 수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에겐 투자의 거장이 내어놓은 이 소중한 자료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기회나 다름없다. 물론 최선은 위기가 오지 않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 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은이), 서혜영 (옮긴이) | 은행나무 | 2020년 2월 "<배를 엮다> 미우라 시온, 식물과 사랑 이야기"

    요리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후지마루. 요리만이 자리하던 그의 세계는 예고 없이 찾아온 사랑으로 흔들린다. 식물에 매료되어 식물학을 전공하고 온종일 연구실에서 식물을 관찰하며 행복을 느끼는 모토무라가 그 주인공이다. 후지마루는 모토무라의 세계 속에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모토무라는 그의 고백을 거절하며 신경도 감정도 없이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한다. 후지마루는 그렇지 않다고, 식물이 감정을 느낄 수 없다 해도 식물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가닿으려 하는 모토무라의 마음 자체가 '사랑'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힘껏 대답하는데…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을 그린 <배를 엮다>와 산촌의 전통적인 삶을 담은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비롯해,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키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온 작가 미우라 시온. 이번 신작 <사랑 없는 세계>는 매혹적인 식물학의 세계를 펼쳐보여 '일본 식물학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일본식물학회 특별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진심과 순수로 무장한 채, 자신만의 소중한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내뿜는 아스라한 빛"이 반짝이는 소설.

  • 혁명노트
    김규항 (지은이) | 알마 | 2020년 2월 "김규항 11년 만의 신작"

    독특한 구성을 가장 먼저 짚어야겠다. 어떤 형식은 그 자체로 품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엔 목차가 없다. 각 페이지의 상단엔 1번부터 119번까지 숫자가 매겨져있고 그 아래에 조각 글들이 있다. 각 숫자는 두 번씩 나온다. 첫 번째 숫자에 달린 글들은 한 줄기로 이어진다. 두 번째 숫자엔 그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 배경 설명, 각주가 달려있다. 이러한 구성은 가독성을 뛰어나게 높인다.

    자본과 계급에 대한 글은 어렵다. 어려운 게 정상이다. 일상적 사고체계를 벗어난 사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사유엔 자신에 대한 부정까지도 포함된다. 스스로와 싸워가며 읽는 글은 힘들다. 이는 더 많은 인민(지배계급의 분명한 일원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인민이다. -239쪽)이 이 주제에 접근하는 데에 분명한 장벽이 된다. 이 책의 구성은 그 장벽을 낮추고자 노력한 결과인 듯하다. 내용상의 어려움은 필연적이겠지만, 내용까지 닿는 길을 매끈하게 닦아놓았다.

    책은 마르크스가 일구어놓은 사상에 큰 틀을 기대어 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구조를 직시하게 한다. 문장은 벼린 칼같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핵심을 찌른다. 동시에 이해를 위해 필요한 현시대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 등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 계급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글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착취,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은폐되는 계급의 문제, 물신화를 짚는다. 설득과 직시의 긴 여정 끝에 책은 결국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혁명을 말한다. 혁명, 결국 이 목적을 위해 이 책은 가장 적합한 형식을 찾은 것이다. 혁명의 관건은 "연결"이고 촘촘한 연결을 위해서는 각성한 인민이 다수가 되어야 하며 친절한 교본은 현실 직시를 위한 좋은 길일 테니까.

  • 곤 gone 1
    수신지 (지은이), 윤정원, 천지선 (감수) | 귤프레스 | 2019년 12월 "지금부터 불편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여성들이 사라져버린(gone) 가상의 세상이 있다. 그녀들이 사라져야만 하는 이유는, 국가가 낙태죄를 더 '실효성'있게 처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생긴 1953년 이후 한 번이라도 낙태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처벌을 받게 되는데 IAT라는 검사를 통해 낙태 유무를 손쉽게 알 수 있으며 이 결과 '양성'으로 판명되면 실형을 선고받는다는 가정이다.

    이 책은 노민형, 노민아, 노민태 세 남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나간다.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하는 워킹맘 민형은, 엄마가 IAT 검사 결과 양성으로 판명됨에 따라 더 이상 아이를 맡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엄마 걱정에 앞서 든 생각은 '이제 아이는 누가 봐주지?'이다. 한편 아이 계획이 없었던 둘째 민아는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이가 있으면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남편의 말에, 결국 일을 못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본인 혼자라는 사실에 씁쓸해지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캐나다 어학연수를 준비하며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던 막내 민태에게 여자친구 샛별의 임신 소식은 놀랍기만 하다. 낙태 수술을 받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길 원하는 샛별이와 병원을 알아보지만 강력해진 낙태금지법 때문에 수술 비용이 치솟아 이대로라면 본인의 어학연수는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1953년부터 규정된 '낙태죄'는 낙태한 여성과 이를 시행한 의료진을 처벌하는 규정으로, 형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 원 이하의 벌금 (의료진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269조, 270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조항이 개정되지 않으면 기존의 낙태죄 규정은 폐지된다.

    그렇다면 <곤 gone 1>의 이야기는 가상일까, 실제일까? <며느라기>로 가부장제의 현실을 서늘하게 짚어낸 수신지 작가가 이번엔 더 깊고 아픈 이야기를 가지고 독자들을 만난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불편해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다.

2.252020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정재찬 (지은이)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2월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교수 신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의 모든 말은 명언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곱씹게 되는 대사가 있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야". 어느샌가 일상이 건조하게 쩍쩍 갈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점검해볼 일이다. 신경 쓰지 못한 새 마음속에 찰랑찰랑 차 있던 시와 미, 낭만, 사랑 같은 영롱함이 증발되진 않았는지.

    <시를 잊은 그대에게>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적셨던 정재찬 교수가 새로운 시들과 함께 돌아왔다. 인생에 대한 열네 가지 주제에 어울리는 시들과 더불어 그가 선물하는 것은, 낡은 자신을 돌볼 여유다. 그러니 이 책은 달음박질치듯 빠르게 읽지 말자. 수록된 시를 마음에 한참 굴려 본 후에 해설을 읽기를 권한다.

  • 공부, 이래도 안되면 포기하세요
    이지훈 (지은이)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결국, 우리 인생의 이야기"

    왕도, 즉 '어떤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한 쉬운 방법'이 공부에는 없다. 공부가 어렵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쉬운 방법을 찾으려는 까닭은 아마도 다급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우리에겐 마음 공부가 먼저 필요할지 모른다. 이 책이 수많은 공부법 책들과의 차별점으로 '최강의 멘탈 솔루션'임을 자처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군법무관으로 현재는 변호사와 유튜버로 활동 중인 저자는 모든 공부는 원리가 똑같다 말하며, 동기, 환경, 시간, 정리, 체력, 멘탈, 고독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에 맞춰 자신의 다양한 노하우를 공유한다.

    그러나 사실 공부할 줄 몰라서 안 하는 사람은 없을 터다. 결국 변하려는 마음가짐,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제목에서처럼 강한 어조로 독자들의 폐부를 찌른다. 큰 것을 원하면 큰 것을 걸어야 한다 말하며, "제발 그놈의 안 된다는 얘기는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곧 인생 이야기가 아니던가. 특히 책의 마지막 장 '고독'이 마음을 울린다. 결국 내 인생이고 내 책임인 것,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 본다. 물론 이 책만은 곁에 두어도 좋겠다.

  •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김민식 (지은이) | 푸른숲 | 2020년 2월 "김민식 PD 신작! 그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법"

    촌철살인 대사들이 맛있었던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혼냈는데 안 쫄면.. 혼내는 입장에서 되게 어색한 거거든".

    이 책을 통해 본 김민식 PD는 혼내는 사람을 어색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PD인 그에게서 카메라를 빼앗고 주조정실로 유배를 보냈더니 그는 화장실을 오가며 혼잣말이랍시고 전사가 울리도록 외친다. "김장겸은 물러나라!" 이에 징계 위원회를 열었더니 그는 임원들 앞에 앉아 A4 용지 55장짜리 소명서를 줄줄 읽으며 혼자만의 필리버스터를 연다. 중간중간 임원들에게 호통치는 대목도 빼놓지 않는다. 혼내는 입장에선 어색함을 넘어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권력에 머리 조아리지 않는 자 앞에 선 부당한 권력만큼 난감한 상황도 없다.

    이 책은 김민식 PD가 어떻게 '싸웠는가'에 대한 내용이지만 그가 어떻게 '사랑했는가'로 바꿔 읽어도 어색함이 없다. 그는 지치지 않고 유쾌하게 싸우고 싸움의 과정에서 다른 방식의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자신과 회사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가 말하는 "딴따라" 기질은 아마도 사랑을 잘하는 능력이 아닐까. 분명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긴데, 책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그가 부러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 하루 3줄 초등 글쓰기의 기적
    윤희솔 (지은이) | 청림Life | 2020년 2월 "생각과 감정이 글이 될 때 아이는 성장한다!"

    18년 차 베테랑 초등 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의 '하루 세 줄 글쓰기' 지도법. 초등 교사인 저자가 교육열이 높은 학군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남다른 교육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직접 마주한 현장은 독서, 글쓰기 등의 기초 교육은 뒤로 한 채 영어, 수학, 과학 등의 시험 점수에만 연연하는 강압식 교육이었다. 아이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교육 현장에서, 글에서만큼은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기를 바랐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의 마음을 살리고 생각하는 힘을 끌어올리는, 부모와 아이가 즐겁고 쉽게 할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을 연구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글쓰기의 기틀 잡기, 초등학교 입학 후 학교생활 적응에도 도움이 되는 글쓰기 팁, 마음을 보듬는 글쓰기, 학습력을 키우는 글쓰기, 창의력을 높이는 글쓰기, 하루 세 줄 글쓰기 등 마음을 보듬고 생각을 정리하게 하는 글쓰기 지도 방법을 책으로 정리했다. 자신의 감정을 올바로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학습력을 키우며, 부모와 친구와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어떻게 글쓰기로 가능한가, 왜 글쓰기인가. 실제 사례와 저자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2.282020
  • 다시, 쓰는, 세계
    손희정 (지은이) | 오월의봄 | 2020년 2월 "손희정이 다시 쓰는 세계의 색"

    몇 해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게임이 있다. 앞뒤로 색이 다른 원판을 바닥에 깔아놓고, 플레이어 두 명이 대결하여 모든 원판을 자신의 색으로 먼저 뒤집으면 이기는 경기다. 룰은 간단한데 승부는 좀체 나지 않았다. 한 명이 아무리 뒤집어도 다른 한 명이 다시 원상태로 뒤집기에 결국은 원점인 상태. 무언가 답답하고 지리멸렬한 게임이었다.

    현 세계와 페미니즘이 이 원판 뒤집기를 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존의 색을 뒤집어 다른 색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 것이 페미니즘의 언어니까. 손희정은 그 언어를 이끌어가는 이들 중 하나다. 주요 플레이어로서 손희정은 이 세계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시' 써왔다. 지배자의 언어로 된 세계를 '다시',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간 세계에서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계에 대고 '다시', 이 책은 그 '다시'들을 모은 기록이다.

    그가 지치지 않고 '다시' 쓴 말들에 기대어 수많은 이들이 버틴다. 끈질기게 반복하며 늘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나아간다. 서문에 그가 썼듯 진부한 이야기는 잘 팔린다. 돈이 된다. 그러나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는 구원이 된다. 그가 쓴 글이 뒤집어 만드는 세계는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색깔이다.

  • 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먼 (지은이), 정지현 (옮긴이) | 민음사 | 2020년 2월 "잠재해 있던 자신의 '힘'을 발견한 여성들"

    가부장제가 아닌 '가모장제'가 수천 년간 뿌리내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파워>는 '문단 권력' 나오미에게 남성 작가 닐이 집필을 끝낸 원고를 읽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로 시작한다. 그의 소설은 각종 역사적 사료를 통해 현재 여성이 갖는 절대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먼 과거를 그리며 '현 사회의 젠더 고정관념'을 뒤집는 내용이다. 이에 나오미는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얼마나 여성의 욕망을 자극하는지 모른다"라며 '어쨌든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은 섹시할 것'이라는 농담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 속 닐의 소설을 함께 읽게 된다. 수천 년 전 '여성 중심 사회'의 시발점이 된 ‘소녀들의 날’, 잔혹한 폭력에 시달리던 몇몇 소녀들은 갑자기 자신의 몸에서 고압 전류가 뿜어져 나와 상대를 공격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신기한 현상은 소셜 미디어로 빠르게 전파되고, 곧 모든 여성들은 잠재되어 있던 자신의 강력한 힘을 깨닫게 된다. 순식간에 여성들은 남성을 제압해 권력을 갖고, 대상만 역전되어 똑같이 가해지는 혐오와 폭력에 남성들은 만성적인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강한 힘을 가진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아름다울까. <파워>는 현실을 미러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힘의 불균형'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주체와 객체만 뒤바뀐 채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과 차별은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음을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힘의 존재가 왜 위험한지를 생각해보자고 촉구한다. <시녀 이야기>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전율할 수밖에 없다. 충격적이다. 이제까지 당연해 보이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보이지 않으리라!"라는 말과 함께 추천했다.

  • 타워
    배명훈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싸워내고 사랑하는 평범한 우리들의 용기"

    SF의 시대가 드디어 왔다고 선언할 수도 있을 것 같은 2020년, 과학 소설계 안에서 근면하게 작품을 생산하며 ''연결'과 '확장'의 핵심적인 역할'(정세랑)을 담당한 배명훈의 첫 소설집 <타워>가 개정 복간되어 11년 만에 다시 독자를 찾았다. '잭과 콩나무(Jack and the beanstalk)'가 연상되는 지상 최대 타워형 도시국가 빈스토크. 674층, 인구 50만 명. 대부분의 이동을 유료 엘리베이터로 하는 공간. 바벨탑을 닮았지만 바벨탑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하는 도시민들이 살고 있는 국가. 뇌물로 줄 법한 비싼 술이 오가는 관계도를 그리면 권력장 분석을 할 수 있는데, 그 권력장의 한가운데에는 어쩐지 '개' (타워 개념어 사전 기준 '개'는 일부 개체는 빈스토크 내 권력 핵심부에 서식하며 '국민'이라고 짖기도 하여 언어 구사 가능성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고 정의되어 있다.)가 존재하는 도시. (<동원 박사 세 사람>) 'SF' 답게 이 소설은 한번 설정한 세계관, 용어를 바탕으로 이야기에 살을 붙여 한 도시의 형상을 건설해나간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어떤 면을 아주 낯선 도시를 통해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신랄하게 묘사해 우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2000년대 초반의 갈등과 혼란을 배경으로 탄생한 2009년 작 <타워>를 2020년에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를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라는 소설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조금의 자비도 찾기 어려운 도시 시스템에도 엘리베이터 옆에 우편함을 놓고 가면 사회의 신뢰를 바탕으로 편지 문건을 알아서 배달해주는 '파란 우편함' 시스템이 있다. 자신의 실수로 우편물 전달을 놓쳐 조은수와 김민소 사이의 편지가 전해지지 않아 두 사람이 어긋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병수는 온 힘을 다해 민소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위성 사진의 픽셀을 확인해 위험에 처한 민소를 구하려는 '익명의', '숫자로' 된 사람들.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에 처한 도시로 가 다른 시민을 도우려 하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할 2020년 다시 이 이야기를 읽는다. "빈스토크는 개인을 신뢰하니까요."라는 문장의 힘, 무용하고 바보같다는 걸 알면서도 (타워 용어사전에서 '바보'는 현대 도시인들 사이에 합의된 최소한의 사악함을 습득하지 못하여 타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의 도리를 행함으로써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기꺼이 해내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이 싸워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 실존 인물, SF 작가인 배명훈의 이야기를 다룬 첫 에세이 <SF 작가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4054370 )도 함께 출간되어 기꺼이 배명훈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히치하이커에게 두 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 진리의 발견
    마리아 포포바 (지은이), 지여울 (옮긴이) | 다른 | 2020년 2월 "아름다운 삶들로 만든 입체화"

    정리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책들이 있다. 대개 공통점은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고유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어떤 책인지 설명하려 하면 여러 가지 말들이 뒤섞여 나온다.

    불가리아 출신의 문화 비평가인 저자 마리아 포포바는 우선 우리가 기억할 만한 여러 인물들의 삶을 구석구석 살폈다.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 마거릿 풀러 등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인생을 완전하게 소화시킨 후 그는 각각의 삶을 펼쳐놓고 서로의 연결고리들을 찾아 턱턱 걸어버린다. 허먼 멜빌이 쓴 사랑의 감상이 훗날 에밀리 디킨슨이 쓸 싯구의 씨앗이 된 것은 아닐지 추측하고 아인슈타인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인부를 목격한 때와 레이철 카슨이 태어난 해를 연결하는 식이다.

    그러니 그가 그리는 인물들의 삶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가는 입체도다. 단순히 기계적인 연결은 아니다. "아름다움 같은 어떤 진실은 상상과 의미 부여라는 빛을 슬쩍 비출 때 가장 명확하게 보인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는 연결들에 납득 가능한 의미를 부여해 이 입체 조형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아름다운 삶들로 만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