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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어린이/유아

이름:김별아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9년, 대한민국 강원도 강릉

직업:소설가

기타: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최근작
2024년 4월 <청소년을 위한 진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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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

비극이다. 우리 근현대사를 쓴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비극에 맞대면하여 슬픔을 감내하는 일이다. 하지만 비장하고 엄숙한 방식만으론 그 비극 속에서도 징그럽도록 끈질기게 존재했던 인생을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 기실 소수의 큰사람을 제외한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란 너덜너덜한 일상을 가까스로 짜깁기한 남루한 누더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하여 결국 나는 그 비극 속에서 가장 희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희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비극적이고, 인간적인.

거짓말쟁이

나는 거짓말을 직업으로 가진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어린 친구들에게든 누구에게든 '거짓말은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시커먼 거짓말이 통하지 않도록 세상이 조금은 깨끗해지고, 하얀 거짓말에 즐겁게 속아 넘어가 줄만큼 세상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지연이처럼 슬픈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세상이 조금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산을 타는 일은 높은 만큼 깊고, 깊은 만큼 높은 이치를 깨닫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내리막길을 달려가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오르막길을 기어오르면서도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상과 심연은 하나’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높은 산이 가장 낮은 바다에서 솟아오르듯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고통과 희열은 애초부터 둘이 아니었음을. 이제, 넘어온 산만큼 넘어갈 삶 앞에서 신발 끈을 단단히 조입니다. 다시 걷는 길에서는 조금 더 가볍게, 즐겁게, 밝은 눈으로 멀리까지 보고 싶습니다. 산을 사랑하는 만큼 삶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높은 만큼 더욱 깊게.

논개 1

10년이 지나도 시절은 괴이쩍고 격랑을 흐르는 배처럼 위태롭다. 열 손가락의 빛나는 가락지와 차랑차랑한 남치맛자락이 더욱 그립다. 그리운 것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 개정판 작가의 말

논개 1

나는 까마아득한 과거의 일을 쓰지만 내 삶은 엄연히 현실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2005년 겨울은 '나라에 곧고 지극한 마음을 바치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재차 곱씹게 했고, 사랑으로 돌이켜지는 생의 의미는 이야기의 터에서 이제는 물이 되고 흙이 되고 바람이 된 그녀를 곧장 조우하게 해주었다. 이제 그녀를 이야기할 때다.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이면서 전설이다. 전설이면서 역사다. 한 민족의 긍지가 관련되면 전설이 역사를 대신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말을 상기한다. 그녀는 환란과 비탄의 시대에 제도와 관념의 견고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누구와도 다른 삶을 만들어 냈다. 모두가 사랑을 비웃을 때 사랑했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려 할 때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오해했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논개, 모두가 다 아는 듯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여인이다.

논개 2

나는 까마아득한 과거의 일을 쓰지만 내 삶은 엄연히 현실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2005년 겨울은 '나라에 곧고 지극한 마음을 바치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재차 곱씹게 했고, 사랑으로 돌이켜지는 생의 의미는 이야기의 터에서 이제는 물이 되고 흙이 되고 바람이 된 그녀를 곧장 조우하게 해주었다. 이제 그녀를 이야기할 때다.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이면서 전설이다. 전설이면서 역사다. 한 민족의 긍지가 관련되면 전설이 역사를 대신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말을 상기한다. 그녀는 환란과 비탄의 시대에 제도와 관념의 견고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누구와도 다른 삶을 만들어 냈다. 모두가 사랑을 비웃을 때 사랑했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려 할 때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오해했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논개, 모두가 다 아는 듯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여인이다.

논개 2

10년이 지나도 시절은 괴이쩍고 격랑을 흐르는 배처럼 위태롭다. 열 손가락의 빛나는 가락지와 차랑차랑한 남치맛자락이 더욱 그립다. 그리운 것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 개정판 작가의 말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염결한 이들이 말하는 소위 '잡문'을 묶어 내놓는 심정이 야릇하다. 두서없이 경황없이 살며 쓰다 보니 어느새 쌓인 것이 이마마해졌다. 업이다, 구업이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선뜻이 치워버리지 못하는 것은 못난 미련이거니와 자백의 충동이다. 언젠가는 내가 글을 쓰는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돌이켜 보니 나는 글로 살고 있다. 내가 쓰는 글과 좌충우돌 갈팡질팡하며 사는 내가 다르지 않다. 모자라거나 어리석은 대로, 나는 내 글이다. 내 글이 나다. 외면하는 것조차 헛짓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꿈결에도 길을 묻곤 한다. 모욕을 견디며, 상실을 이기며,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내 안에서 왕왕 울리는 질문들, 내 어깨 너머에서 궁싯거리는 질문들, 내 곁에 나를 닮은 허기진 얼굴들이 꾸역꾸역 토하는 질문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질문 앞에 허겁지겁 들내놓은 부족한 대답에 다름 아니다.

미실

<화랑세기>와 신라 여인 '미실'을 만나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때마침 나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십 년을 살고도 지나친 아집으로 독자들을 외면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장악할 수 없는 인물,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미실은 실제로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인물이었다. 내가 훈련받은 도덕을 간단히 뛰어넘는 여인, 내가 아는 역사를 단단히 배반하는 여인, 자신이 부여받은 시대를 가장 충실하게 살아가는 배덕자. 그녀에게 사로잡혀 시간 여행을 하는 일은 즐거웠다. 미실에게 정열과 순정을 다 바친 아름다운 남자들을 만나는 일도 행복했다. 그리고 실로 그녀의 음덕을 입은 것인지, 나는 이 부족한 소설로 뜻밖의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백범

한국독립투쟁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백범 김구의 생애를 쓰는 동안 나는 줄곧 묻고 또 물었다. 왜 그렇게 살고 왜 그렇게 죽어야 했냐고. 그에게 묻고, 내게 물었다. 오직 끝없는 질문 속에서만 그를 이해할 길을 찾을 수 있기에, 이미 안다고 믿었던 답들을 거듭 묻고 재차 확인했다. 그의 생애는 <백범일기>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백범일기>를 읽은 사람들과 아직 읽지 못한 사람들을 동시에 가상의 독자로 상정하고 소설 작업을 했다. 알아야 할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 사이에 오욕과 질곡의 역사 속에 우뚝 선 거인에 대한 질문을 놓아두었다. 왜 우리는 오늘 그를 읽어야 하는가? 그는 왜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가?

백범, 거대한 슬픔

슬픔은 분노만큼 뜨겁지는 않지만 낮고 질기고 도도하다. 그것은 물처럼 유유히 흐르며 역사의 파랑에 휩쓸린 나약한 인간들을 적신다. 그리하여 슬픔도 마침내 힘이 된다. 나는 그 자잘한 상처 같은 시간 속에서 변한 것들과 변하지 않은 것들을 동시에 기꺼워한다. 기어이 슬퍼하고 기꺼이 슬퍼하기 위해, 나는 좀 더 배우고 쓰고 살아내야 한다.

식구

가족은 단순한 구원처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의 진원지도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을 제공할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구원이자 상처인 가족, 나를 꼭 닮은 낯선 타인들에 대해.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내가 만난 그녀는 상처받은 아이였다. 사랑받은 적이 없기에 사랑할 줄 모르는 한없이 외로운 아이였다. 또한 세상을 믿지 못하는 뿌리 깊은 불신자로서, 혐오와 환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해와 자멸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 어우동은 세상의 모든 여자에 대한 환상과 공포의 결합체이자, 끝내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엄마

아이가 넘어질 때 받아주어 아이가 큰 상처 없이 일어서도록 도와주시는 삼신할망, 나는 옛 엄마들이 안방구석에 매달아두었던 삼신할망 몫의 고깔을 씌운 쌀 주머니를 내 마음 한구석에 조심스레 달아두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하고 감사하다고.

열애

박열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라는 호칭에 가둘 수 없는 열혈한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유의지는 ‘일본인 아내’라는 이름에 가려질 수 없다. 1926년 봄, 도쿄의 대심원 대법정에 울려 퍼졌던 일갈은 민족과 성별을 뛰어넘는 인간성의 절규였다. 그들은 젊고 치열했다. 아나키즘의 상징색인 검정처럼 세상의 불순한 빛을 모두 흡수해 청정한 새 빛으로 부활하고자 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순정한 사랑의 빛에 어찌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영영 이별 영이별

기록된 역사는 ‘사랑을 잃고 힘을 얻기에 실패한’ 여인들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 있는 귀신’으로 지질하고 서러운 생애를 배겨낸 그녀들에게도 비밀스럽고 신비한 역사는 존재한다. 나는 침묵에 지친 그 혼백들과의 동행이 두렵기보다 흔연했다. 그들의 수다에 맞장구를 치고, 구구절절 슬픈 사연에 함께 울고, 전설이 되어버린 소문의 꿈을 꾸는 사이, 그녀들은 어느덧 나의 역사가 된다.

월성을 걷는 시간

“이토록 기이한 부재와 묵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첨성대와 불국사와 석굴암은 알아도 월성은 모른다. 학창 시절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도 없었다. 월성지는 실제로 천년이 넘도록 궁성의 흔적조차 없이 완벽한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웃한 안압지(동궁과 월지)를 비롯해 대릉원, 황룡사, 남산, 첨성대 등이 월성을 둘러싸듯 자리 잡고 있음에도 정작 그 알짬이 없었다. 삶터를 외면한 채 무덤과 기도처와 천문대 들만 들추고 다녔던 게다. 이토록 기이한 부재 와 묵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외람되이 가슴이 뛴다. 신라와 서라벌에 대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아는 듯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그리하여 월성이라는 비밀의 열쇠를 품고 경주로 향하는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여전히 모르는 것들 앞에 달떠 두근거린다.

탄실

김명순에게 ‘최초의 여성 소설가’라는 이름을 되찾아주어야 마땅한 것은 그녀가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까지 최초의 ‘여성’ 소설가였기에 남성 중심 사회와 문단에서 받았던 비정한 처우 때문이다. 그녀는 정당한 문학적 평가를 받을 짬조차 없이 출신 성분과 사생활을 빌미로 난도질당했고, 그리하여 그녀의 작품들은 영혼의 확장을 통해 고유의 세계를 축조할 요량도 없이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이 될 수밖에 없었다. (……) 그리하여 나의 작업은 김명순에게 내리 찍힌 불도장을 지우고 오롯한 작가이자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회복하려는 의도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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