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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김정남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0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2년 1월 <도시는 무엇을 꿈꾸는가>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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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숭고한 슬픔이라고 부르겠다. 사적 감정이라는 시작(詩作)의 동인이 공적 영역으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미학화(aestheticiz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육체를 얻고 그 외연을 모든 존재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인간의 시간 속에서 “슬픔으로만 키가 크고 살이 찌”는 “슬픈 환생”이 여기 있다. 운명의 타로 카드에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몇 번이고 덧칠”을 해도 “세상은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눈물”만을 받아갔다. 그리하여 “나와 나 자신과 단 둘이 살/그런 빈방”을 얻고자 해도, 세상은 그 최후의 안식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Octavio paz)이라면 그녀의 시는 이러한 시적 계시에 충실하다. “신도 자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지옥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녀의 시에서 드러나는 절망은 간절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눈물의 소질을 타고 난” 그녀는, “1초 만이라도” “정말 못되게 굴고 싶”지만, “슬픔을 편애하는” 숙명에 맞서 선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운진의 시는 자신의 운명과 황폐한 세상에 맞서는 가장 “아름다운 복수”라고 할 수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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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미학에 있어 추상성(abstractness)과 구상성(concreteness)은 서로 길항하는 예술사적 진자운동의 두 축을 차지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구상성을 배제하면 예술은 추상적인 경향을 띠고, 구상성을 추구하면 예술은 구체적인 형체와 내용을 지향한다. 이 상반된 두 가지 양상은 시대에 따라, 예술가의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경사(傾斜)를 나타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령 시인의 미적 경향은 일상의 세목들에서 구체적 감각을 건져 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상의 얼개를 짜나가는 구상성의 미학을 뚜렷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평자로서 이지령 시인의 시가 구상성을 고유한 자신의 미적 특질로 정화시키길 바란다. 구성성과 추상성이 삼투하면, 시인 백석의 ‘이야기체’가 그러하듯 길고 유장한 생의 세목들을 보다 든든하게 떠받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의 자리가 평면적이라면, 시는 이를 바탕으로 간절하게 밀고 올라가는 수직의 세계다. 온몸으로 기어오르는 담쟁이의 숙명처럼 말이다. 따라서 구상적 평면성은 추상적 수직성과 연결되어야 한다. 맘이 담을 얻어 몸이 되고, 담이 몸을 얻어 맘이 되듯!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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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나뭇가지에 세 들어 사는 새는 까치발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고, 그 마음을 아는 나뭇가지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걸 바라보는 하느님도 따뜻한 어둠으로 그들을 덮어주는 모습은 서정적 자아가 자연물을 자신의 의식으로 견인하여 그것을 내적으로 인격화한 장면이다. 이처럼 ‘그것’(es)을 ‘너’(du)로 받아들이는 의인관적 세계관이 문학적으로 유효하다면, 이 작품에 나타나는 ‘나뭇가지’와 ‘새’와 ‘하느님’ 사이의 조화와 공존이 인간사에서는 발견되기 어렵다는 희박성의 원리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연친화적 시작의 원리가 사회의 당면 문제를 외면하거나 그로부터 이격되어 있다는 클리세는 늘 따라다녔지만, 그것은 문학을 당위적 명목론으로 환원시키는 단순성에 다름 아니다. 서정이 지향하는 공존과 평화에의 모색은 본질적인 것이며, 이는 문학은 단지 거기 있음으로 해서 사회비판적이라는 아도르노의 오래된 탁론을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시가 사회적 사실에 대한 확성기가 되거나 스키조의 난해한 위악적 포즈로 둔갑하는 일은 모두 가짜다.
4.
숭고한 슬픔이라고 부르겠다. 사적 감정이라는 시작(詩作)의 동인이 공적 영역으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미학화(aestheticiz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육체를 얻고 그 외연을 모든 존재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인간의 시간 속에서 “슬픔으로만 키가 크고 살이 찌”는 “슬픈 환생”이 여기 있다. 운명의 타로 카드에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몇 번이고 덧칠”을 해도 “세상은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눈물”만을 받아갔다. 그리하여 “나와 나 자신과 단 둘이 살/그런 빈방”을 얻고자 해도, 세상은 그 최후의 안식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Octavio paz)이라면 그녀의 시는 이러한 시적 계시에 충실하다. “신도 자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지옥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녀의 시에서 드러나는 절망은 간절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눈물의 소질을 타고 난” 그녀는, “1초 만이라도” “정말 못되게 굴고 싶”지만, “슬픔을 편애하는” 숙명에 맞서 선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운진의 시는 자신의 운명과 황폐한 세상에 맞서는 가장 “아름다운 복수”라고 할 수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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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시는 오후 4시의 장르다. 격정의 순간을 뒤로 한 채, 고자누룩하게 내려쬐는 늦은 오후의 햇살 같은 것이다. 그 사양(斜陽)은 시간을 익히는 마지막 안간힘이다. 그것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깊은 저녁 그늘 속에 안길 수 있다. 시란 바로 이러한 순간의 기록이다. 「열네 살의 터널」에서 ‘검은 구멍’이라는 생의 기미를 이미 알아버린 소녀는, 이제 자신이 ‘세월을 견딘 허수아비’이며 ‘지푸라기’(「번지점프」)라는 것을 감지할 만큼 깊어졌고, 더 나아가 ‘10원 뺑이 화투판’(「장마」)을 벌이는 할머니들의 한 많은 세월까지도 감싸 안는다. ‘풍단이여, 났다. 났어. 내도 요 사슴처름 살고 싶었는디’라는 회한의 말은 누구나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모진 세월 견딘 이들의 깊은 속내를 발견하고 함께 울 줄 아는, 오후 4시의 성대(聲帶)를 가진 시인이다. ‘우리 엄마 이사 오는 날’(「마지막 이사」)에서 그렁그렁한 눈물 끝에 무엇이 따라오는가. 미제 축음기, 일제 유리그릇, 문주란 레코드판……. ‘자들이 와 강물에 둥둥 따라 오노’ 그것들은 어머니의 눈물 속에 떠오르는 사무치는 세월이다. 시인 최진화가 쓴 담박한 오후의 풍경은, 먹먹하고 때론 아득하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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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일부러 다리에 힘을 빼고 걸어야 할 때가 있고, 목에 힘을 빼고 담담하게 노래를 불러야 할 때도 있고, 똑바로 보지 말고 빗봐야 할 때가 있다. 근 30여 년 동안 6권의 시집으로 생의 자리를 베어내었으니, 그 곡절들이 지나간 만큼 관록이 몸에 붙기 마련이다. 김정호가, 김민기가 핏대를 세워 노래 부른 적이 있었던가. 그의 시에 화려한 수사와 기교가 있는가, 감정의 과잉이 있는가. 그의 시의 구질은 언제나 직구와 커브의 중간쯤 되는 슬라이더다. 식자우환의 먹물과 고독한 한량의 중간 지점에 그의 시가 놓여 있다. 한량은 죽어도 기생집 울타리 밑에서 죽는다, 는 말처럼 그의 시는 갑갑한 대학 연구실과 허름한 동네 호프집 사이에 심드렁하게 담배 꼬나물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해야겠다. 그의 시의 발화지점은 늘 날카롭고 위태롭다는 사실. 내가 말이야, 라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늘 외출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는가. ‘되돌아올 수 없는 거리’ 저편에 ‘나를 벌 세워놓았’다. 그의 시가 아픈 이유는 여기에 있다. 드러난 현상 저편에 늘 내가 외로운 형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생을 관조하듯 냉소하지만, 그 안에는 곪아터진 시간과 상처가 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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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더 이상 낭만주의적 시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시인이 차지하는 자리이며 그 오욕은 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자발적 소외의 대가다. 총체적 교환사회로부터 이처럼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시인이야말로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사르트르가 혐오해마지 않았던 일요화가란 바로 이 거리가 상실된 사이비 예술가를 지칭한다. 휴일이면 화구통이나 메고 산이나 들을 찾아 사생을 즐기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딜레탕트의 산물이, 그 어떤 미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백우선 시인은, 시가 고뇌와 절망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미적 자의식 속을 헤매 다니지도 않았고, 작위적 관념을 지어내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이상화된 자연이나 관념화된 현실의 틀 속에 갇혀 있지도 않았다. 어떠한 면에서 그는 서정과 현실이 길항하며 맞부딪치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자신과 문학과 현실의 공유지면을 끈질긴 견인력으로 지탱해 온 강인한 시혼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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